유럽 경제 위기, 우리가 알던 선진국 유럽이 몰락한 진짜 이유

도대체 과거 전 세계를 호령하던 선진국 유럽이 왜 이토록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일까. 유럽 경제 위기의 본질은 외부 수탈과 공짜 안보에 의존하던 기생적 번영 구조의 유효기간이 마침내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은 바깥에서 저렴한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미국이 대주는 안보 우산 아래에서 복지국가의 낙원을 노래해 왔지만, 지정학적 격변과 내부 인구 절벽이 덮치자 그 화려한 겉껍데기가 벗겨지며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파리의 에펠탑, 로마의 콜로세움, 산토리니의 파란 지붕, 프라하의 고즈넉한 밤골목. 우리가 오랫동안 기억해 온 유럽은 낭만적인 여행 엽서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풍경 뒤편에서는 상징적인 산업 거점들이 속속 불을 끄고 있다. 독일의 100년 넘은 화학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고, 프랑스는 천문학적인 나랏빚으로 신용등급이 깎였으며, 영국은 아예 살림을 따로 차리겠다며 연합을 걸어나갔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선진국 유럽'이라는 명제는 이제 더 이상 몸에 맞지 않는 어색한 옷이 되어버렸다.

숫자는 감정을 담지 않기에 더 서늘하고 정확하다. 2008년 유럽연합(EU) 27개국의 경제 규모는 16조 달러로, 당시 14조 달러였던 미국을 확연히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미국 경제가 87퍼센트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동안 유럽연합은 겨우 13퍼센트 성장하는 데 그쳤다. 현재 유럽의 경제 규모는 미국의 3분의 2 수준으로 무참히 떨어졌다.

유럽에 대형 자연재해가 덮친 것도, 사람들이 갑자기 일을 손에서 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하던 대로' 했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하던 대로' 해온 방식이 유럽을 절벽 끝으로 내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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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해보면

  • 유럽의 번영은 식민지 수탈, 미국의 마셜 플랜, 러시아의 싼 가스라는 '외부 빨대'에 기반한 착시였다.
  • 에너지 공급망이 깨지고 중국 시장이 이탈하자 독일을 필두로 한 유럽의 제조업 기반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 브렉시트는 감정적 정치 선동이 초래한 자해극이었으며, 10년이 지난 지금 유탄은 중소기업과 서민에게 돌아갔다.
  • 과도한 규제와 낡은 노동시장, 쪼개진 자본시장으로 인해 유럽은 기술 혁신과 기업 육성 경쟁에서 완전히 도태되었다.
  • 그러나 한편에서는 재정 규율을 수정하고 남유럽을 중심으로 새로운 체질 개선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공존한다.

번영의 환상과 유럽연합 탄생의 숨은 이면

석탄과 철로 묶은 원수들의 연합과 공동체의 출발

오늘날 폭성하는 유럽 경제 위기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럽연합이 만들어진 비극적인 역사적 출발점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유럽은 단 한 세대 만에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렀고, 그 잔혹한 도살장의 한복판에는 언제나 프랑스와 독일이 서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 전역의 도시는 잿더미였고, 사람들은 영혼을 갉아먹는 공포 속에서 "이러다 또 온다"며 다음 전쟁을 불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5월,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파리에서 던진 제안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정교한 정치적 덫이었다. 프랑스와 서독의 석탄과 철강 자원을 하나의 최고 기관 아래 두고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왜 하필 석탄과 철이었을까. 그것들이 바로 대포를 짓어내고 탱크를 굴리는 중공업의 핵심 재료였기 때문이다.

무기 재료를 하나의 창고에 넣고 열쇠를 나눠 가지면 어느 한 나라가 몰래 군대를 키우고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어느 한 나라가 몰래 군대를 키울 수가 없습니다. 서로 믿는 약속이 아니라 배신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든 거예요."라는 신념 아래 1951년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6개국이 도장을 찍었다. 이 협의체는 관세를 없애고 국경을 허물며 1993년 유럽연합이라는 이름을 달았고, 1999년에는 '유로'라는 하나의 돈을 공유하는 거대한 한 몸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공룡 공동체에 거리를 두며 겉돌던 이단아가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은 1960년대 두 번이나 가입을 신청했지만, 당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에 의해 번번이 막혔다. "영국은 유럽보다 미국과 더 가깝다는 이유였어요."라는 드골의 간파는 정확했다. 영국은 1973년에야 겨우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끝까지 파운드화를 고수하며 한 발만 걸친 채 혜택을 누리다가 2016년 결국 작별을 고했다.

외부에 꽂아둔 빨대, 식민지 수탈과 마셜 플랜의 착시

1920년의 세계 지도를 펴보면 대륙 전체가 하나의 색으로 뒤덮여 있는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된다. 지구 육지의 24퍼센트가 영국 한 나라의 영토였고, 전 세계 인구 4명 중 1명이 런던에서 내려오는 규칙을 따라 하루를 살았다. 그러나 지도상의 거대한 영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부 속에 적힌 서늘한 수치들이다.

네덜란드라는 작은 나라의 예산 장부를 들여다보자. 19세기 중반 45년 동안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네덜란드 본국 국고로 입금된 돈만 무려 8억 2,300만 길더였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 국가 전체 예산의 약 3분의 1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정부 지갑에 들어오는 돈 세 장 중 한 장이 지구 반대편 농민들의 피와 땀에서 짜낸 수탈액이었던 셈이다. 식민지는 낭만적인 모험담이 아니라 유럽 국가 재정표의 가장 굵은 줄이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그 수탈 구조가 깨지자, 유럽을 일으켜 세운 것은 대서양 건너 미국의 돈이었다. 1948년부터 4년간 전후 복구 프로그램인 마셜 플랜을 통해 133억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유럽 16개국으로 흘러들어갔다. 가장 많은 원조를 받은 것은 영국이었고, 패전국인 서독조차 네 번째로 많은 돈을 쥐었다.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유럽 복구의 청구서는 전부 미국이 결제해 준 셈이다.

🔥 기생적 번영의 본질

유럽이 지난 세기 동안 누려온 풍요와 고상한 문화는 그 자신들의 우월한 생산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유럽은 바깥에 빨대를 꽂고 살았던 겁니다." 지도 위의 남의 땅을 뜯어먹고, 미국의 지갑에 의존하여 연명하던 유효기간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공짜 안보와 복지 국가라는 달콤한 착각의 기한 만료

미국의 수표책은 안보 영역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군사 동맹을 만들어 두고, 2016년 기준 전체 회비의 72퍼센트를 미국 혼자 부담했다. 유럽 국가들은 2014년에 모여 "우리도 번 돈의 2퍼센트는 자기 국방비로 쓰자"고 엄숙히 약속했지만, 그해 그 약속을 지킨 나라는 32개국 중 단 3곳에 불과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놓고 나 몰라라 딴청을 피운 것이다. 이 약속이 서른두 나라 전체에서 채워진 것은 불과 작년의 일이다.

미국이 국방이라는 가장 비싼 비용을 대신 치러주는 동안, 유럽은 내부에서 화려한 대가를 쌓아 올렸다. 무상 의료, 두툼한 실업급여, 넉넉한 노후 연금. 우리가 흔히 부러워하는 '유럽식 복지 국가'의 기틀이 196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에 집중적으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그 완벽해 보이던 복지 설계도에는 정작 가장 중요한 변수 두 가지가 빠져 있었다. 첫째, 의학의 발달로 인류가 이토록 오래 살게 될 줄 몰랐다. 둘째, 젊은이들이 아이를 이만큼이나 안 낳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공짜 리소스와 미국이 받쳐주는 안보 방패에 의존해 주말마다 여유롭게 카페테리아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즐기던 시절은 지나갔다. 외부의 빨대가 하나씩 뽑혀 나가는 순간, 유럽이 마주한 것은 가혹한 냉수마찰이었다.

파이프라인이 멈춘 순간 드러난 독일 제조업의 비극

노르트스트림의 차단과 32억 유로 에너지 폭탄의 실체

독일 라인강변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화학 단지.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기초 화학 물질들은 자동차 시트가 되고, 아기 기저귀가 되며, 건물의 페인트가 된다. 독일 제조업의 핵심 중의 핵심이자 유럽 산업의 심장부라 불리는 곳이다. 그러나 2022년 이 회사의 장부에는 충격적인 숫자가 찍혔다. 단 한 해 동안 에너지 비용으로만 추가 지출된 돈이 무려 32억 유로(약 4조 7천억 원)에 달했다.

공장을 새로 지은 것도, 물건을 더 많이 만든 것도 아니었다. 생산량은 작년과 똑같았는데 지출 고지서의 숫자만 경악할 수준으로 부풀어 올랐다. 버티다 못한 회사는 이듬해 2월, 2,600명에 달하는 근로자를 감원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독일이 부자가 된 공식은 지극히 단순했다. 러시아에서 파이프관으로 싼 가스를 들여와 물건을 만든 뒤, 지갑 두툼한 중국 손님에게 파는 구조였다.

그 파이프의 실체가 바로 발트해 바닥을 지나 독일로 직통 연결되던 '노르트스트림'이었다. 독일인들에게 그 가스관은 원하는 만큼 틀면 나오는 수돗물과 같았다. 그러나 2022년 여름, 가스 공급량이 40퍼센트로 줄어들더니 순식간에 20퍼센트로 토막 났고, 가을에는 아예 '0퍼센트'가 되었다.

심지어 완공해 두고 개통만을 기다리던 노르트스트림 2호관은 단 한 번도 가스를 흘려보내지 못한 채 바닷속에서 폭파되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독일은 2023년 봄 마지막 남아있던 원자력 발전소 3곳의 스위치마저 완전히 꺼버렸다. 가장 저렴한 에너지원 두 개를 스스로, 그리고 타의에 의해 동시에 상실한 독일 경제는 사상 초유의 에너지 이중고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국 시장의 이탈과 멈춰버린 '메이드 인 저머니' 컨베이어 벨트

에너지 폭탄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최대 고객이었던 중국의 변심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상하이와 베이징의 번화가에서 폭스바겐이나 벤츠 마크를 보지 않고 한 블록을 걷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독일 자동차는 부의 상징이자 중국 중산층이 가장 열망하는 소비재였다.

하지만 15년 동안 지켜오던 중국 시장 판매 1위 자리는 2023년 중국 자국 전기차 업체인 BYD 등에게 무참히 빼앗겼다. 남의 차를 사주던 손님이 이제는 더 싸고 스마트한 차를 직접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다. 내연기관 시대의 압도적 기술 격차는 소프트웨어와 배터리 중심의 전기차 시대가 열리면서 단숨에 무력화되었다.

📊 숫자로 보는 독일 제조업의 비명

조립 라인이 멈춰 서는 것은 눈보다 귀가 먼저 알아차린다. 컨베이어 벨트가 돌 때 나던 특유의 '웅웅'거리는 진동음이 사라지면, 작업자가 공구를 놓는 소리와 셔터 내리는 소리만 침묵 속에 울려 퍼진다.

작년 한 해 동안 독일에서 파산 신청을 하고 문을 닫은 기업은 2만 3,900곳으로,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독일 경제의 버팀목이던 중소 부품업체(미텔슈탄트)들이 원자재 가격 상승과 수요 감소를 견디지 못하고 줄도산하고 있다. 90년 전통을 자랑하던 부품사들이 동유럽으로 공장을 옮기거나 아예 법정 관리로 들어가는 모습은 '메이드 인 저머니'라는 신화가 완전히 종말을 고했음을 암시한다.

인구 절벽과 연금 충격, 거리에 쏟아져 나온 유럽의 노년층

에너지와 시장이라는 외생적 악재 뒤에는 인구 구조라는 더 거대하고 피할 수 없는 내부의 시한폭탄이 돌아가고 있었다. 2024년 기준 유럽 합계출산율은 여성 1명당 1명 남짓으로 통계 작성 이래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지중해 연안이나 동유럽 일부 국가들은 이미 1.0선마저 깨진 지 오래다.

현재 유럽은 일하는 청장년층 3명이 노인 1명의 연금을 받쳐주는 구조로 겨우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불과 25년 뒤인 2050년이 되면 일하는 사람 2명도 안 되는 인원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한다. 지금의 연금 시스템은 '3명이 1명을 넉넉히 받치던' 1960년대의 인구 구조를 전제로 만들어진 달콤한 설계도였다.

수학적으로 불가능해진 방정식 앞에서 각국 정부는 연금 개혁이라는 칼을 빼 들었다. 프랑스 정부는 연금 수령 시작 나이를 62세에서 64세로 2년 올리기 위해 하원 표결을 생략하고 헌법 특별 조항을 invocation하여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파리 시내는 분노한 시민들의 화염병과 쓰레기 대란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은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동유럽과 국외에 문을 열어두었다. 새벽 4시 농장 트럭에 올라타 딸기를 따는 노동자, 요양원에서 밤을 새우며 노인을 수발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동쪽에서 건너온 이주 노동자들이다. "유럽이 문을 열어둔 건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닫는 순간 저 계산서를 자기 돈으로 막아야 했으니까요."

금속 파이프와 탑이 늘어선 대규모 화학 공장 | 검은색눈사람

라는 냉소적인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감정이 부른 자해극, 브렉시트가 남긴 처절한 계산서

빨간 버스의 거짓말과 도버 항구에 멈춰 선 10만 개 기업

2016년 6월, 영국 전역의 투표소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투표율은 72.2퍼센트로 199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결과는 탈퇴 52퍼센트 대 잔류 48퍼센트. 불과 4퍼센트포인트 차이로 영국은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라는 미지의 바다로 배를 몰았다.

탈퇴파를 이끈 정치인들은 빨간색 이층 버스 측면에 거대한 문구를 선명하게 새기고 전국을 누볐다. "우리는 매주 3억 5,000만 파운드를 브뤼셀(EU)로 보내고 있다. 그 돈을 빼앗아 우리 국민보건서비스(NHS) 병원에 쓰자!" 통쾌하고 직관적인 선동이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치명적인 눈속임이었다. 영국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EU로부터 다시 돌려받는 각종 보조금과 환급금을 빼면 영국의 실제 순 유출액은 주당 2억 5,000만 파운드 수준이었다. 이마저도 EU 단일 시장 입장에 따른 경제적 이득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승리에 도취했던 정치인들은 "질 경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한 번도 끝까지 계산해 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2021년 1월 1일 브렉시트가 실제로 발효되자, 영국 도버 항구는 순식간에 거대한 트럭 주차장으로 변했다. 예전에는 서류 한 장 없이 통과하던 국경선에 겹겹이 행정 장벽이 서섰다. 트럭 한 대에 실린 물품이 20가지면 20가지 항목을 일일이 서류에 적고 세관 도장을 받아야 했다. 서류의 오타 하나만으로 트럭 기사는 항구 바닥에서 며칠씩 밤을 새워야 했다.

그해 영국의 대유럽 상품 수출은 270억 파운드(약 45조 원)가 날아갔고, 전체 유럽 수출 물량은 13퍼센트 넘게 급감했다. EU 시장에 물건을 팔던 영국 기업 12만 곳 중 2만 곳이 수출을 포기하여 10만 곳으로 줄어들었다. 시장에서 쫓겨난 1만 6,400여 개 기업의 대부분은 복잡해진 관료주의 서류 작업을 버틸 인력이 없던 직원 10명 미만의 영세한 중소기업들이었다.

국경을 닫자 밀려든 이민자와 빼앗긴 어장이라는 아이러니

브렉시트를 찬성했던 서민들이 가장 갈망했던 것은 "외국인 노동자를 막아 우리 일자리와 복지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서글픈 아이러니로 귀결되었다.

2023년 6월까지 1년간 영국의 순 이동 인구(유입자에서 유출자를 뺀 숫자)는 무려 **90만 6,000명**을 기록했다. 영국 역사상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상 최대의 폭증이었다. 유럽연합에서 오던 동유럽 노동자들의 문을 닫아버리자, 간호사, 간병인, 농가 일손이 부족해진 영국 정부가 인도, 나이지리아, 필리핀 등 비유럽권 노동자들에게 비자 문호를 훨씬 더 넓게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한쪽 문을 쾅 닫았더니 다른 쪽 문이 대문짝만하게 열린 꼴이다.

어업 이슈는 한층 더 기가 막힌 반전을 보여준다. "우리 바다를 되찾자!"라는 구호는 브렉시트 진영의 가장 강력한 감정적 슬로건이었다. 탈퇴 결과 영국 어가들의 어획 할당량은 전체 금액 기준 12.4퍼센트 늘어났다. 약속대로 바다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고등어나 청어를 잡는 거대 자본의 대형 어선 어획량만 60퍼센트 폭증했을 뿐, 항구에서 피를 토하며 탈퇴를 외쳤던 연안의 소형 어선 어민들의 몫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게다가 영국 정부는 2025년 들어 유럽 어선들이 영국 수역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권리를 **2038년까지 13년 더 연장**해 주었다. 통대구를 잡을 권리를 내주고 세관 장벽을 완화받기 위한 구걸이었다.

10년 만에 날아온 영수증과 냉혹한 민낯의 여론

탈퇴 단행 후 10년이 흐른 지금, 영국인들이 받아 든 계산서는 차갑기 그지없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영국 국민의 57퍼센트가 "EU를 나간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응답했으며, "잘한 결정"이라는 답변은 30퍼센트에 턱없이 못 미쳤다. 여론의 추는 완전히 뒤집혔다.

그러나 여기서 한층 더 깊은 인간 심리의 모순이 드러난다. 당시 브렉시트 표를 직접 던졌던 탈퇴 투표자들만 따로 추출해 물었을 때, 여전히 **64퍼센트는 "지금 다시 투표해도 나는 나가자고 찍을 것"**이라고 답했다. 10년 동안 경제가 쪼그라들고 수출길이 막히는 뼈아픈 수치를 직접 경험하고도, 자기 선택을 철회하고 생각을 바꾼 사람은 23퍼센트에 불과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침공이나 지정학적 변수로 인해 외부의 빨대가 강제로 뽑혀 나갔지만, 영국은 스스로 자기 손으로 자기 목에 꽂힌 빨대를 뽑아 버렸다. 그리고 그 감정적인 선택이 얼마나 끔찍한 경제적 후폭풍을 가져오는지, 전 세계를 향해 10년 치의 생생한 데이터로 증명해 보이는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혁신을 멈춘 대가, 미국과의 GDP 격차와 규제 경직성

50년간 1,000억 유로 기업 0개, 판 아크 보고서가 밝힌 기술 확산의 실패

전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대기업들을 시가총액 순으로 나열해 보면 서글픈 현상에 직면한다. 최상단은 엔비디아, 마이크론소프트, 애플, 아마존 같은 미국 거대 테크 기업들이 독식하고 있고, 중간중간 대만의 TSMC나 한국의 삼성전자 같은 아시아 기업들이 이름을 올린다. 유럽 기업의 이름을 찾으려면 스크롤을 한참이나 내려야 한다.

2024년,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의 보고서에 이어 발표된 '판 아크 보고서'는 유럽 경제에 대한 처절한 자해적 반성문이다. 보고서에는 가슴을 찌르는 단 한 줄의 통계가 적혀 있다. "지난 50년 동안 유럽에서 몸값 1,000억 유로(약 145조 원)를 넘긴 새 회사가 단 한 곳도 새로 태어나지 않았다." 실제 수치는 정확히 '0개'다.

같은 50년 동안 미국에서는 시가총액 **1조 유로**를 돌파한 신생 공룡 기업이 6개나 쏟아져 나왔다. 유럽에서 태어난 유망한 기술 스타트업조차 조금만 덩치를 키우면 **30퍼센트가 짐을 싸서 본사를 미국으로 옮겨버린다.** 유럽의 고질적인 자본시장 파편화와 과도한 규제 환경 속에서는 더 이상 거목이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의 시간당 실질 GDP 증가액 격차는 2018년 이후 무려 **7배**로 벌어졌다. 판 아크 보고서는 유럽이 첨단 기술을 개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개발된 기술을 산업 전반에 흡수하고 퍼뜨리는 **'기술 확산(diffusion)' 능력이 완전히 마비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미국 기업들이 AI를 도입해 무형 자산과 일하는 방식을 혁신할 때, 유럽은 낡은 프로세스와 노동조합의 반대에 막혀 제자리걸음만 했다.

35만 쪽의 허가 서류와 AI 법안이라는 관료주의 덫

유럽이 자랑하던 고상한 관료주의와 행정 절차는 이제 경제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되었다. 실제 사례를 보면 기가 막힌다. 영국 스코틀랜드 전력회사는 자국 내에서 송전선 설치 허가를 받는 데만 무려 **12년**의 세월을 허비해야 했다.

런던 템스강 하구를 지나는 새로운 지하 터널 건설 프로젝트의 경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환경영향평가와 인허가 서류 작성 비용으로만 **3억 4,000만 달러(약 4,500억 원)**를 지출했다. 제출된 서류의 분량은 무려 **35만 9,000쪽**에 달했다. 종이 서류를 쌓아 올리는 데 국력을 낭비하는 사이 혁신의 골든타임은 흘러갔다.

💭 관료주의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세계 시장에서 "미국은 혁신하고, 중국은 모방하며, 유럽은 규제한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통용된다.

유럽연합은 세계 최초로 거창한 '인공지능법(AI Act)'과 '디지털서비스법(DSA)'을 제정하며 감독관 행세를 했지만, 정작 그 법으로 규제할 자국의 세계적인 AI 기업은 단 한 곳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기술을 만들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규제부터 겹겹이 겹쳐 놓으니, 스타트업들은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다. 혁신의 싹을 스스로 꺾어버리는 이 한심한 규제 만능주의는 남의 일이 아니다.

노동 유연성을 저버리고 기업의 발목에 규제 모래주머니를 달아매는 모든 사회가 빠지기 쉬운 가장 달콤한 함정이다.

산업용 전기 요금 역시 기업들의 탈유럽을 부추긴다. 유럽 제조업 공장들이 내는 전기 요금은 미국의 **2배에서 3배**에 달한다. 첨단 데이터센터나 배터리 공장을 지으려 해도 불을 켜는 순간부터 미국 기업과의 가격 경쟁에서 패배하고 들어가는 구조다.

분열하는 27개국과 전기차 관세 표결에 드러난 각자도생

밖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신산업 주도권을 쥐고 거칠게 밀어붙이는데, 안에서 뭉쳐야 할 유럽연합 27개국은 이익이 갈리자 무기력하게 분열하고 있다.

2024년 가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중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을 받고 밀려드는 중국산 저가 전기차에 대해 최고 45퍼센트의 보상관세를 물리기로 결정하고 회원국 표결에 붙였다. 유럽 자동차 산업의 생존이 걸린 중차대한 표결이었다.

그러나 단일 대오가 형성되어야 할 표결에서 스페인은 찬성 표를 던지지 않고 기권을 선택했다. 표결 직전 중국 정부가 "스페인산 돼지고기와 브랜디에 대해 반덤핑 조사를 개시하겠다"며 콕 집어 보복성 경고를 날렸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유럽 전체의 자동차 산업을 지키는 대의보다 자국 농민들의 돼지고기 수출길을 지키는 현실적 이익을 택했다.

영국은 배를 버리고 나갔고, 남은 27개국은 위기가 들이닥치자 연합이라는 거창한 간판을 뒤로한 채 각자 자기 나라 장부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한 동아리 안에 지갑 27개가 따로 들어있는 구조적 한계가 지정학적 파도 앞에서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다.

유럽 경제 위기 속 새로운 이행과 남유럽의 반격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부활, 짐 덩어리에서 성장 엔진으로

그렇다면 유럽 경제는 완전히 붕괴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유럽 통계청이 발표한 숫자는 단순한 종말론을 거부한다. 유로존 전체 실업률은 **6.1%**로, 1999년 유로화라는 돈이 처음 만들어진 이래 역사상 가장 낮은 일자리 기근 상태를 기록하고 있다. 경제가 비명 속에 완전 무너졌다면 나올 수 없는 아이러니한 숫자다.

더욱 흥미로운 반전은 유럽 경제의 지형도 개편이다. 10년 전 재정 위기 시절, "빚만 지고 일은 안 하는 유럽의 짐 덩어리"라며 남유럽 국가들을 향해 "빛만 지고 일은 안 한다고 유럽의 짐이라고 불리던 남쪽 나라들이요"라며 손가락질하던 때가 있었다. 일명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라 불리던 이 남쪽 나라들이 지금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성장 엔진으로 변신했다.

작년 선진국 경제 성적표 상위권은 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가 휩쓸었고, 스페인의 경제 성장률은 유로존 평균의 2배를 웃돌았다. 한때 고개를 들지 못하던 남유럽 국가들이 어떻게 반전에 성공했을까.

팬데믹 이후 폭발한 전 세계 여행객들이 지중해로 밀려들었고, 남유럽 국가들이 일찍부터 투자해 둔 태양광과 풍력 덕분에 유럽에서 가장 싼 전기 요금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민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부족한 일손을 채웠다. 남유럽은 자신들이 가진 자원을 마침내 "가진 걸 제값 받고 팔기 시작한 거죠."

독일 헌법의 '빚 제한' 수정, 무너지는 소리가 아닌 체질 개선

유럽의 맹주인 독일 역시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독일 헌법에는 **'빚 그만(Schuldenbremse, 재정 브레이크)'**이라는 철칙이 굳건히 박혀 있었다. 정부가 한 해 동안 새로 낼 수 있는 적자 재정 수치에 강력한 뚜껑을 씌워놓은 조항으로, 지난 15년 동안 그 어떤 정치인도 감히 손대지 못하던 금기이자 성역이었다.

그러나 2025년 3월, 독일 의회는 이 헌법 조항을 전격 개정했다. 국가 안보를 위한 국방비와 무너져 내리는 도로, 철도, 전력망 등 기반 시설에 투입할 예산은 이 재정 브레이크 제한 구역 밖으로 빼내어 마음껏 빚을 내어 쓸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것이다.

완고하게 재정 건전성만을 고집하던 독일이 헌법까지 고쳐가며 돈을 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프라와 국방에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하겠다는 신호다. 이것은 건물이 붕괴하는 소리가 아니라, 기존의 실패한 모델을 버리고 "그건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라 방향을 트는 소리에요"라는 고통스러운 체질 개선의 신호탄일 수 있다.

유럽이 치러야 할 거대한 역사적 계산서와 우리의 과제

유럽이 전 세계의 중심에 앉아 문명의 주도권을 쥐고 호령하던 시간은 긴 인류 역사에서 길게 잡아도 지난 400년 남짓에 불과하다. 인류가 땅에 씨앗을 뿌리고 농경을 시작한 지 만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400년은 아주 강렬하지만 한 단락의 굵은 챕터일 뿐이다.

지금 끝나가고 있는 것은 '유럽'이라는 대륙 자체가 아니다. 바깥에 빨대를 꽂아 남의 자원과 남의 지갑, 남의 안보에 기생하여 무임승차하던 **'유럽의 기생적 번영 체제'**가 비로소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영국 도버 항구에는 오늘도 도장을 기다리는 트럭들이 길게 엔진을 끄고 서 있다. 옛날에는 서류 한 장 없이 그냥 건너가던 바다였지만, 이제는 도장 하나를 받기 위해 긴 기다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역사는 누가 먼저 부자가 되었는지보다, 그 부의 청구서가 도착했을 때 그 값을 언제 어떻게 치르는가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유럽이 마주한 가혹한 청구서는 남의 일이 아니다. 저출산 고령화, 경직된 노동시장, 규제에 갇힌 신산업, 에너지 안보 위기까지. 지금 유럽이 치르고 있는 그 가혹한 계산서의 항목들은 불행하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과 너무나 정교하게 닮아있다.

❓ 자주 묻는 질문

Q. 유럽 경제가 미국에 비해 크게 뒤처지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요?

유럽은 오랜 기간 러시아의 저렴한 에너지와 중국 수출 시장, 그리고 미국의 안보 우산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지정학적 갈등으로 에너지 공급망이 깨지고 중국 시장에서 밀려나면서 산업 경쟁력을 잃었다.

여기에 27개국으로 분절된 자본시장, 과도한 관료주의 규제, 과감한 기술 투자 및 확산 실패가 overlapping 되며 미국과의 생산성 격차가 7배 이상 벌어졌다.

Q. 유럽연합은 원래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나요?

유럽연합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와 독일 간의 재전쟁을 막기 위해 출발했다. 1950년 로베르 슈만의 제안으로 전쟁 무기의 핵심 재료인 석탄과 철강을 한 기관에서 공동 관리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결성한 것이 시초다.

서로 믿는 서약이 아니라 무기를 몰래 만들 수 없는 구조적 통합을 통해 평화와 경제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했다.

Q. 과거 선진국이던 유럽 국가들이 최근 동남아 수준으로 추락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실제 동남아 수준으로 하락했다기보다는, 과거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위상에 비해 심각한 저성장과 산업 기반 붕괴를 겪고 있음을 비유한 표현이다. 지난 15년간 미국 경제가 87% 성장할 때 유럽은 13% 성장에 그쳤고, 제조업 공장들이 고비용과 에너지 난으로 줄도산하거나 해외로 이탈하면서 선진국형 복지와 인프라를 유지할 재정적 역량이 급격히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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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한 시대의 화려했던 신화가 저물고, 청구서의 시간이 도래하는 역사적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유럽이 던지는 이 차가운 경고장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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