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솔리다임 상장 추진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증시가 다시 한번 거버넌스 충격에 휩싸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솔리다임의 미국 나스닥 상장은 회사의 외형 확장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모회사 일반 주주의 몫을 쪼개 외부와 나누는 명백한 주주가치 훼손이자 전형적인 자회사 쪼개기 상장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 호황 속에서 사상 최대 실적을 바라보는 기업이 주주 환원은커녕 또다시 자회사를 떼어내 별도로 상장시키겠다는 발상을 내놓았으니 시장이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코스피 시장에서 뼈아프게 겪었던 LG에너지솔루션 분할 상장의 트라우마가 채 가시기도 전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하던 SK하이닉스가 이번에는 낸드플래시의 핵심 자회사인 솔리다임을 들고 미국 증시로 떠나려 하고 있다.
겉으로는 AI 데이터센터 확장에 따른 투자 재원을 조달하기 위함이라고 포장하지만, 그 실질을 들여다보면 국내 소액주주들이 피땀 흘려 감내한 적자의 시간을 뒤로한 채 알짜 과실만 빼돌리는 행태에 불과하다.
국내 개인 투자자들이 분노하며 국장 탈출을 외치는 배경에는 바로 이런 지독한 주주 멸시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주가는 단순히 회사가 벌어들이는 이익의 크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업이 주주를 대하는 태도, 즉 시장의 신뢰를 뜻하는 멀티플(밸류에이션 배수)이 곱해져야 비로소 제대로 된 주가가 완성된다.
지금 SK하이닉스의 멀티플이 박살 나고 코스피 전체가 저평가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지배구조의 왜곡과 후진적인 거버넌스 이슈가 시장의 근간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왜 이 상장이 국장을 무너뜨리는 뇌관인지 그 본질을 낱낱이 파헤쳐 보고자 한다.

SK하이닉스 솔리다임 상장 추진과 멀티플 폭락의 진실
돈을 잘 버는데 왜 주가는 무너지는가
최근 주식시장의 흐름을 지켜보며 깊은 탄식을 내뱉은 투자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중국 스타트업의 딥시크(DeepSeek) 모델이 예상 밖의 성능을 내며 엔비디아를 비롯한 빅테크 생태계에 긴장감을 불어넣었고,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전체가 요동쳤다.
하지만 SK하이닉스의 주가를 바닥으로 끌어내린 진짜 칼날은 기술 경쟁이나 일시적인 반도체 업황 우려 따위가 아니었다. 팩트는 명확하다.
하이닉스는 지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돈을 잘 벌고 있다. HBM3E 공급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천문학적인 영업이익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가가 고꾸라진 이유는 단 하나, 바로 SK하이닉스 솔리다임 상장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익 × 멀티플'의 공식을 따른다. 이익이 10조 원, 20조 원으로 폭발해도 시장이 부여하는 멀티플이 반토막 나면 주가는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폭락한다.
실제로 지난 7월 말 상한가에 근접했던 주가는 8월 초 솔리다임의 미국 나스닥 상장설이 구체화되자마자 단숨에 하루 10% 가까이 곤두박질쳤다. 시장의 한쪽에선 "주가는 결국 실적과 이익을 따라가니 걱정 없다"는 안이한 소리를 지껄인다.
하지만 이는 자본시장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소리다. "너 바보냐, 2 곱하기 멀티플인데 멀티플이 8월 3일 이후로 지금 박살 나고 있지 않느냐"라는 시장의 격한 일갈은 그래서 지극히 정당하다.
회사가 아무리 돈을 긁어모아도 그 이익이 오롯이 내 주머니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도관체로 새어나간다면, 그 주식을 대체 누가 프리미엄을 주고 사겠는가.
같은 메모리 반도체 섹터에 있으면서도 왜 삼성전자가 상대적으로 멀티플 방어를 해왔는지, 왜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기술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높은 밸류에이션을 받는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마이크론은 미국 시장에서 20배에 달하는 PER(주가수익비율)을 누릴 때, 한국의 반도체 대장주는 5배도 채 받지 못해 허덕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뼈아프게 직면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민낯이다. 지배주주의 잇속에 따라 주주가치를 언제든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시장이라는 낙인이 찍힌 순간,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멀티플의 추락을 막을 수 없다.
🔥 주주 멸시가 부른 멀티플의 붕괴
회사가 천문학적인 이익을 내고 있어도 시장이 외면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지배주주와 경영진이 일반 주주의 이익을 언제든 편취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익이 아무리 잘 나와도 투자자들이 '어차피 지들이 다 도관체 만들어서 딴 데로 뺄 텐데'라고 생각하면 주가는 오르지 않는다.
앵무새 같은 해명 뒤에 숨은 주주 멸시
시장이 들끓고 주가가 곤두박질치자 SK 측에서 내놓은 공식 입장은 참으로 기가 막혔다. "확정된 바 없다", "주주가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겠다"는 말만 녹음기처럼 반복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는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를 대표 주관사로 선정하고, JP모건, 씨티그룹, UBS 등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을 줄줄이 끌어모아 베이크 오프(경쟁 프레젠테이션)를 진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측근 로비스트가 이끄는 '발라드 파트너스'와 자문 계약을 맺고, 퀄컴 출신의 대관 담당 부사장까지 영입하는 등 상장을 향한 시계추를 멈추지 않았다. 말로는 미정이라면서 뒤에서는 미국 나스닥 입성을 위해 일사천리로 판을 깔고 있었던 셈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대기업들이 주주를 기만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시장이 반발하면 일단 "검토 중이나 정해진 것은 없다"며 소나기를 피하고, 잠잠해지면 슬그머니 작업을 강행한다.
주주를 회사의 동반자가 아니라, 필요할 때 자금이나 대주는 호구로 취급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표리부동한 행태를 보일 수 있는가.
주주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긴다는 기업이, 주주들이 결사반대하는 자회사 분할 상장 카드를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둔 채 언제 꺼낼지만 저울질하고 있는 꼴이다.
진정으로 주주를 위한다면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시장이 안도할 수 있도록 "솔리다임 상장은 어떠한 형태로든 추진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어야 했다. 그러나 사측은 끝끝내 여지를 남기며 불확실성을 키웠다.
이러한 불투명성과 기만적 태도는 시장의 신뢰를 밑바닥까지 갉아먹었다. 주주를 이토록 철저히 등한시하는 기업에 어떤 장기 투자자가 믿고 돈을 묻어두겠는가.
결국 참다못한 투자자들이 하나둘 국장을 탈출해 미국 증시로 떠나는 비극은 기업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다.
솔리다임 지배구조 개편과 5단 중복상장의 함정
인텔 인수부터 'AI컴퍼니' 신설까지의 지배구조
솔리다임의 태생부터 지배구조가 어떻게 꼬여왔는지를 복기해 보면 그 속내가 더욱 투명하게 드러난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020년 10월, 약 90억 달러(당시 한화 약 10조 원)를 투입해 인텔의 낸드플래시 및 SSD 사업부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2021년 미국 법인 솔리다임을 출범시켰다. 솔리다임은 인수 직후부터 2023년까지 극심한 반도체 다운턴을 겪으며 무려 8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누적 순손실을 냈다.
그 기나긴 암흑기와 적자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은 것은 누구였는가? 바로 SK하이닉스의 주가를 지탱하며 물타기를 하고 배당 축소를 감내해 온 국내 일반 주주들이었다.
그런데 AI 열풍이 불어닥치고 데이터센터용 고용량 기업용 SSD(eSSD) 수요가 폭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올해 상반기에만 매출 12조 2,500억 원을 기록하며 솔리다임이 흑자 전환에 성공하자, SK그룹은 대단히 교묘한 지배구조 개편을 단행했다.
올해 초 SK하이닉스와 솔리다임 사이에 'AI컴퍼니'라는 중간 지주 법인을 불쑥 신설해 집어넣은 것이다.
현재의 출자 고리를 보면 'SK㈜ → SK스퀘어 → SK하이닉스 → AI컴퍼니 → 솔리다임'이라는 기괴한 5단 피라미드 구조가 완성되었다.

여기에 더해 AI컴퍼니에는 SK 전직 고위 임원이 설립한 사모펀드와 일부 SK 계열사들이 지분 투자를 단행했다.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모회사가 100% 지분을 보유한 채 사업의 과실을 온전히 누려야 마땅하건만, 굳이 중간에 법인을 끼워 넣고 외부 및 내부 특수관계인의 자금을 섞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최하단의 솔리다임을 나스닥에 떼어내 상장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8조 원의 빚더미를 감당할 때는 주주들에게 인내를 강요하더니, 이제 돈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자 상장이라는 명목으로 숟가락을 얹으려는 세력들이 등장한 모양새다.
📊 숫자로 보면
솔리다임이 감내했던 8조 원의 적자는 하이닉스 주주들의 피눈물이었다. 상장 후 최대 200조 원(1,50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기업가치 중 10~15%의 지분이 공모로 빠져나가면, 하이닉스 주주들의 몫은 앉은자리에서 증발한다.
100% 자회사를 쪼갤 때 발생하는 이익 유출
상장이 현실화될 경우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는 단순한 심리적 위축에 그치지 않는다. 현재 솔리다임의 지분은 SK하이닉스가 100%를 실질 지배하고 있으므로, 솔리다임이 벌어들이는 모든 당기순이익은 온전히 SK하이닉스 연결 실적으로 귀속된다.
현재 하이닉스 전체 이익의 약 30%를 차지하는 낸드 사업부에서 솔리다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훌쩍 넘는다. 즉 하이닉스 전체 영업이익의 15% 이상을 솔리다임 홀로 책임지는 구조다.
그런데 솔리다임이 미국 증시에 상장되어 신주를 발행하고 외부 자본이 유입되면 어떻게 되는가?
시장에서 추정하는 공모 규모만 최대 150억 달러(약 20조 원)에 달하며, 기업가치는 1,500억 달러(약 200조 원)에 육박한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최소 10% 이상의 지분이 외부 투자자에게 희석된다.
이는 곧 솔리다임이 벌어들일 막대한 미래 현금흐름의 10~15%가 SK하이닉스 주주가 아닌 외부 나스닥 주주들에게 영구적으로 넘어가게 됨을 뜻한다. 기존 하이닉스 주주들 입장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회사의 핵심 캐시카우 지분을 강탈당하는 것과 다름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더블카운팅(중복계산) 할인'이다. 국내 증시에서 모회사와 자회사가 동시 상장되었을 때 모회사의 주가가 겪어야 했던 가혹한 지분가치 할인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자회사가 별도로 거래되면 모회사는 지주사 디스카운트를 얻어맞아 30~50%씩 기업가치를 강제로 깎여야 한다. "이게 중복 상장만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SK 총수랑 계열사가 가로채니까 더 문제인데요"라는 시장의 비판은, 지배주주의 지배력 확대와 계열사 자금 지원을 위해 소액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희생시키는 한국 재벌의 고질적 행태를 정면으로 찌르고 있다.
규제 사각지대와 해외 상장의 꼼수
금융당국과 한국거래소는 지난 8월 3일부터 쪼개기 상장을 방지하기 위한 이른바 '5대 주주보호 의무'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모회사 이사회에 주주 영향 평가서 작성, 권익 보호 방안 마련, 주주 소통, 이사회 찬반 결의 및 자회사 통지, 거래소 사전 심사 등의 절차를 밟도록 강제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태생부터 치명적인 구멍을 안고 있다. 주총 특별결의를 통한 주주동의 절차는 기존 사업부를 떼어내는 '물적분할 자회사'에만 의무화되어 있을 뿐, 외부에서 인수한 회사나 신설 법인은 권고사항에 불과하다.
SK하이닉스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들고 있다. 솔리다임은 자신들이 직접 쪼갠 것이 아니라 과거 인텔로부터 사들인 회사이므로 제도적 규제 대상인 '물적분할'이 아니라는 말장난 같은 논리를 펼치고 있다.
게다가 국내 증시가 아닌 미국 나스닥으로 직행할 경우, 한국거래소의 깐깐한 상장 심사조차 회피할 수 있다. 국내 규정을 위반해도 고작 수억 원 수준의 상장계약위약금이나 1일간의 매매거래정지 처분을 받는 것이 고작이다.
20조 원의 공모 자금을 만지는 대기업 입장에서 10억 원 안팎의 벌금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공정거래법상 일반지주회사의 손자회사는 국내 계열사 주식을 가질 때 100% 지분을 보유해야 하므로 4단 이상의 중복 상장이 법적으로 차단된다. 그러나 이 법률 조항 역시 '국내 계열사'에만 한정되어 있어, 미국에 세워진 AI컴퍼니와 솔리다임은 유유히 법망을 빠져나간다.
명백히 주주의 부를 침탈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법률의 빈틈을 악용해 해외로 도망치듯 상장하는 행태를 주주들이 과연 납득할 수 있겠는가. "법적으로는 말장난이 가능할지 몰라도, 주주 가치 훼손 여부를 살펴봐야 한다"는 분노가 터져 나오는 까닭이다.
종합 메모리 전략 'MaaS'와 자회사 분할의 자가당착
최태원 회장의 '서비스형 메모리' 구상
솔리다임의 분할 상장이 더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는, SK그룹 스스로가 공언한 반도체 미래 전략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 7월 '메모리 애저 서비스(Memory as a Service, MaaS)'라는 새로운 청사진을 야심 차게 발표했다.
고객이 요구하는 다양한 AI 컴퓨팅 환경에 맞춰, 반도체 제조사가 단품 칩을 납품하는 수준을 넘어 모든 메모리 솔루션을 맞춤형(Custom)으로 일괄 공급하겠다는 구상이다. 메모리 피라미드의 최상단에 있는 SRAM과 HBM부터 DRAM, 그리고 대용량 스토리지를 담당하는 낸드플래시와 초고용량 eSSD까지 하나로 묶어 패키징 솔루션으로 제공하겠다는 비전이었다.
AI 에이전트의 시대가 본격화되면 메모리 계층 구조의 유기적 결합은 회사의 생사를 가르는 핵심 경쟁력이 된다. 카이스트 김정호 교수가 제시한 인공지능 메모리 계층 모델만 보더라도, 과거처럼 연산 장치(GPU)와 메모리가 일대일로 통신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초고속 처리를 돕는 HBM과 방대한 파라미터 및 문맥을 저장해야 하는 낸드 스토리지가 서로 얽혀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병목 현상을 해소해야 한다. 즉, 고객 맞춤형 턴키 솔루션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D램 기술과 낸드 기술을 한 몸에 품고 있는 '종합 메모리 회사(IDM)'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스스로 "에이전트 시대에는 고객 맞춤형 패키징 솔루션, 턴키 방식의 토탈 메모리 시스템을 제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던 경영진이다. 그런데 정작 사업을 전개하는 방향은 거꾸로 가고 있다.
턴키로 묶어 팔아야 할 핵심 축인 초고용량 eSSD와 낸드 사업부를 미국 법인으로 완전히 떼어내 별도 상장시키겠다는 발상은, 회사의 전략적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자가당착이다.
💡 요약해보면
- AI 시대 메모리 경쟁력은 D램과 낸드를 아우르는 맞춤형 패키징 'MaaS(턴키 솔루션)'에서 나온다.
- 낸드의 핵심인 솔리다임을 떼어내 상장하는 것은 스스로 종합 메모리 기업의 지위를 포기하는 모순이다.
- 사업적으로는 결합을 외치면서 지배구조로는 분할을 추진하는 이중적 행태가 시장의 불신을 키운다.
왜 알짜 낸드 사업부를 굳이 떼어내려 하는가
낸드플래시만을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샌디스크 같은 단품 제조사와 종합 메모리 제조사의 밸류에이션이 다른 이유는 명확하다. 메모리 다운턴의 파고가 닥쳤을 때 상호 보완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의 안정성, 그리고 AI 서버 구축 시 원스톱으로 납품할 수 있는 협상력 때문이다.
"D램부터 낸드까지 싹 다 처리할 수 있는 종합 메모리 회사여야지 미래가 유망한 것인데, 왜 낸드 부분을 떼어내려고 하는가?"라는 물음 앞에 SK하이닉스는 정직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측과 일부 옹호론자들은 미국 내 신규 공장 건설 자금을 마련하고 미·중 갈등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나스닥 상장이 불가피하다고 항변한다. 솔리다임의 주력 생산 거점이 중국 다롄에 묶여 있어 미국의 반도체 장비 반입 규제 리스크가 크니, 미국 현지 자본을 끌어들여 오하이오나 인디애나 등 미국 내 팹을 지어야 한다는 논리다.
류형근 대신증권 연구원 등 일각에서는 해외 공장 투자와 미 증시 상장이 관세 리스크를 축소하고 지분 희석 이상의 성장을 가져와 실보다 득이 크다는 장밋빛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BI) 역시 지분이 10% 희석되더라도 주당순이익(EPS) 감소폭은 1% 미만에 불과해 IPO 조달 자금으로 투자를 늘리는 편이 낫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공급자 중심의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자금이 필요하다면 모회사의 막대한 잉여현금흐름(FCF)이나 회사채 발행, 혹은 글로벌 합작법인(JV) 설립 등 기존 주주의 지분을 희석하지 않고도 자금을 조달할 방법은 널려 있다.
이미 수조 원대 영업흑자를 쏟아내고 있는 모회사를 두고 굳이 알짜 손자회사를 쪼개 나스닥에 올리려는 의도는, 결국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그룹 차원의 현금 확보와 지배력 유지라는 숨은 이해관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거둘 수 없다.
'국장 탈출'을 부추기는 기업들의 모럴해저드
개인 투자자들 사이에서 "국장에 장기 투자하면 바보"라는 자조 섞인 유행어가 번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 증시는 기술 혁신이나 기업의 성장이 곧 주주의 자산 증식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유망한 사업부가 생기면 물적분할로 쪼개 상장하고, 기존 주주는 껍데기만 남은 모회사를 쥐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LG화학에서 배터리를 떼어내 상장했던 LG에너지솔루션 사태가 남긴 깊은 상흔이 바로 그 증거다.
SK하이닉스의 이번 솔리다임 상장 추진은 그 궤를 완벽히 같이한다. 아니, 국내 상장을 넘어 미국 나스닥으로 직행해 국내 주주들의 법적 저항선마저 무력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한층 더 진화한 형태의 모럴해저드다.
알짜배기 핵심 자회사는 미국 투자자들에게 상납하고, 코스피에 남은 주주들은 사이클 산업의 변동성 위험만 고스란히 짊어지라는 것인가.
이러한 행태가 반복되는 한, 정부가 아무리 밸류업 프로그램을 외치고 세제 혜택을 쏟아부어도 코스피의 레벨업은 요원하다.
이것이야말로 국장을 죽이는 자해 공갈이다. 미래 먹거리라며 주주들의 돈으로 적자를 메워 키워놓은 사업을, 이제 결실을 볼 때가 되니 미국 시장에 팔아치우듯 분리하는 기업을 보며 어느 바보가 한국 주식에 연금 같은 장기 자금을 묻어두겠는가.
결국 자본시장 선진화의 최대 걸림돌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주주를 동업자로 인정하지 않는 재벌 대기업들의 왜곡된 거버넌스와 이를 방조하는 제도적 무관심이다.
침묵하는 자본시장과 금융당국의 직무유기
애널리스트들의 침묵과 기울어진 운동장
이토록 중대한 100조 원대 자본시장 왜곡 이슈가 터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의도 증권가의 리서치센터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하다. SK하이닉스의 솔리다임 상장 추진 소식에 정면으로 비판 보고서를 내거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는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왜 그들은 침묵하는가? 그 이유는 명확하다. 자본시장의 분석가라는 애널리스트들이 기업 앞에서는 철저한 '을'의 위치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실적 자료를 받아보고, 경영진 인터뷰를 주선받고, 기업설명회(IR)에 참석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애널리스트는 출입처인 기업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과거부터 대기업에 대해 소신껏 매도 리포트를 쓰거나 중립 의견만 제시해도 즉각 IR 출입이 정지되고 탐방이 거부되는 살벌한 보복이 자행되어 왔다.
"애널은 기본적으로 을입니다. 갑은 기업이에요"라는 현장의 자조는 여의도의 슬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장밋빛 목표주가만 남발하는 리서치 환경에서, 소액주주의 권익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뚝이다.
그 결과 정보의 비대칭성은 극에 달하고 피해는 온전히 개인 투자자들의 몫으로 전가된다. 기관과 외국인은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며 비중을 줄여나갈 때, 증권사 보고서만 믿고 있던 개인들은 또다시 주가 급락의 직격탄을 맞는다.
지배주주와 결탁한 자본시장의 카르텔 속에서 정직한 비판과 분석이 실종된 현실이야말로 한국 자본시장이 삼류로 평가받는 근본적인 이유다.
정치권의 뒤늦은 반응과 안철수·오기형 의원의 지적
그나마 침묵의 카르텔에 균열을 낸 것은 여론의 분노를 감지한 정치권의 일부 목소리였다.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SK 솔리다임 상장을 막아야 한다.
방치하면 국장이 종말된다"는 직설적인 경고를 던졌다. 그는 "SK 하이닉스 주주의 이익을 SK 총수랑 계열사가 슉킹하려는 시도다"라며 이번 사태의 본질이 중복 상장을 넘어선 부의 편취 시도임을 정확히 꼬집었다.
대기업 총수 일가와 지주사의 이익을 위해 자회사를 분할해 상장시키는 관행을 방치한다면, 한국 증시의 존립 기반 자체가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오기형 의원 역시 상장의 당위성과 모회사 주주에게 미치는 영향을 명확히 소명해야 한다며 날을 세웠다. 같은 당 나경원 의원 등 여야를 막론하고 주주 권익 침해에 대한 우려가 산발적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권의 반발조차 여전히 근본적인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일회성 정치 공방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대기업의 눈치를 보느라 상법 개정과 중복상장 금지 법안을 미온적으로 처리해 온 입법부의 나태함이 지금의 참사를 키운 것이다.
특히 현 정부가 추진하는 지역 균형 발전 정책 및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와 얽히면서, 일각에서는 최태원 회장이 전남 호남권 반도체 투자 카드를 내세워 솔리다임 상장이라는 지배구조 개편의 면죄부를 얻으려 하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번지고 있다.
산업 정책이라는 거대한 명분 뒤에 숨어 자본시장의 규율과 소액주주의 희생을 묵인하는 밀실 거래가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공정한 법과 원칙은 재벌 총수 앞에서도 예외 없이 작동해야 마땅하다.
💭 개인적인 생각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지배구조 개혁과 공정경제를 외쳤지만, 현실의 자본시장은 여전히 재벌 총수와 지배주주의 사익 추구에 무력하게 휘둘리고 있다. 윤석열 씨 재임 시절 자본시장 체질 개선을 공언하며 내놓았던 대책들 역시 껍데기뿐인 가이드라인에 불과했음이 이번 솔리다임 사태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법망의 빈틈을 찾아 미국으로 도망치듯 자회사를 쪼개 올리는 약탈적 금융 행태를 방치하면서, 어떻게 청년 세대와 국민들에게 국장에 투자해 미래를 준비하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기업이 주주를 동업자가 아닌 수탈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봉건적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 자본시장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지배주주의 이익이 아닌 '전체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보호하도록 상법 제382조의3을 즉각 개정하고, 중복 상장 규제의 사각지대를 완전히 틀어막아야만 진정한 시장 정상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금융부처의 강력한 철퇴와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이제 칼자루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으로 넘어가 있다. 자본시장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금융부처가 이번 사태를 그저 기업의 자율적 경영 판단이라는 핑계로 수수방관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금융부처에서 철퇴를 때려야 합니다. 아니면 진짜 한국 증시 사망하는 겁니다"라는 절규는 시장 참여자들의 처절한 비명이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당장 다음과 같은 강력한 조치를 실행에 옮겨야 한다. 첫째, 해외 상장을 추진하는 자회사라 할지라도 모회사가 국내 상장사라면 '물적분할' 여부와 상관없이 엄격한 주주총회 특별결의와 주식매수청구권을 부여하도록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
둘째, 자회사 상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회사의 주주가치 훼손과 지분 희석에 대해 이사회가 법적 손해배상 책임을 지도록 상법상의 이사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명문화해야 한다.
말장난에 불과한 규제 회피를 엄단하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솔리다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다. 알짜 자회사를 미국 증시에 빼앗기고 껍데기만 남은 국장에 장기 투자의 싹이 틀 리 만무하다.
대기업의 눈치를 보며 좌고우면할 시간이 없다. 금융당국이 즉각 엄중한 경고를 내리고 상장 추진에 제동을 걸어야만 벼랑 끝에 몰린 한국 증시의 마지막 신뢰를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 자주 묻는 질문
Q. SK하이닉스가 솔리다임을 미국에 상장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시장 확대로 수요가 급증한 기업용 SSD(eSSD) 사업의 생산거점과 기술 투자를 위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명분이다. 특히 중국 다롄 공장의 미·중 규제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미국 현지 자본을 유치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Q. 솔리다임 상장이 기존 SK하이닉스 주주에게 악재인 이유는?
현재 100% 실질 지배하며 누리고 있는 솔리다임의 막대한 미래 이익이 나스닥의 외부 주주들에게 희석되기 때문이다. 또한 모회사와 자회사가 동시 상장됨에 따라 모회사의 주가가 자산 가치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더블카운팅(중복계산) 할인'이 발생해 주가가 하락 압력을 받게 된다.
Q. 자회사 쪼개기 상장이 한국 증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무엇인가요?
적자 시기에는 일반 주주의 희생으로 회사를 키워놓고, 흑자가 나자마자 알짜 사업부를 떼어내 별도 상장시키는 행태는 기업 거버넌스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이는 코스피 전체의 밸류에이션(멀티플)을 깎아내리고 개인 투자자들의 국장 이탈을 가속화시키는 주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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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를 멸시하고 껍데기만 남기는 자본시장에는 그 어떤 장밋빛 미래도 존재할 수 없다. SK하이닉스가 진정으로 글로벌 톱티어 반도체 기업으로 존중받고 싶다면, 기술력뿐만 아니라 주주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글로벌 스탠더드를 갖추어야 한다.
솔리다임 상장 강행이라는 무리수가 국장의 종말을 고하는 신호탄이 될 것인지, 아니면 주주가치 제고라는 자본시장의 본령을 되찾는 자성의 계기가 될 것인지 시장은 서늘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투자한 것은 기술이었을까, 아니면 언젠가 쪼개져 나갈 껍데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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