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독재 시절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사찰과 조작 수사의 실체는 국가폭력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과 가족을 파괴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중앙정보부의 언론 탄압과 민간인 미행 감시 폭로는 단순한 과거의 흑역사가 아니라, 제어되지 않은 공권력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증명하는 생생한 기록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남산의 중앙정보부는 법 위에 군림하며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았다. 서울중앙지검이라는 공식 사법 기구가 존재했음에도 겉으로만 검사들이 수사하는 척 시늉을 냈을 뿐, 실질적인 기획과 고문, 조작 수사는 모두 음지의 중정 손아귀에서 이루어졌다.
이 끔찍한 국가폭력의 현장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전직 중앙정보부 감찰실 요원 최종선 씨의 육성 증언은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뼈아픈 전율을 안긴다.
어두웠던 유신 시절,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친형 최종길 교수를 간첩 혐의로 몰아세운 정보부의 손에 제 손으로 넘겨주어야만 했던 한 요원의 평생에 걸친 죄책감과 고뇌. 그리고 진실을 세상에 폭로하기 위해 집필된 기록 『산자여 말하라』와 영화 『암살자들』로 이어진 비극적인 역사의 궤적을 짚어보고자 한다.
권력이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민간인을 그림자처럼 미행 감시하던 그 시절의 공포 정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웅변한다.

💡 요약해보면
- 검찰 위의 중앙정보부: 서울중앙지검 수사는 허울뿐이었으며, 문세광·육영수 사건을 비롯한 주요 시국사건은 중정의 조작된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 최종길 교수 의문사의 진실: 중정 정규과정 9기 수석 최종선 요원이 형을 설득해 동행시켰으나 돌아온 것은 처참한 고문치사와 자살 위장이었다.
- 언론 검열과 민간인 사찰: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처럼 기사를 검열 삭제하고 비판적 인사를 그림자처럼 미행 감시하던 공포정치였다.
중앙정보부의 기획 수사와 오염된 기록의 실체
검찰 수사의 허울과 남산의 그림자
1970년대 유신 정권하에서 사법 정의는 완전히 실종된 상태였다. 대외적으로는 서울중앙지검 검사들이 엄정한 법 집행을 하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이는 정권의 정당성을 위장하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했다.
모든 시국사건과 정권 안보 사건의 배후에는 남산 중앙정보부가 똬리를 틀고 앉아 전체 수사 방향과 조작된 시나리오를 하달하고 있었다.
공식 사법 절차를 무력화한 채 정보 기관이 수사권을 독점하는 기형적인 구조 속에서, 법치주의는 정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검찰은 정보부가 짜놓은 각본에 서명하고 기소장을 작성하는 대리인으로 기능했으며, 고문과 협박으로 얻어낸 허위 자백이 법정에서 유죄의 유일한 증거로 둔갑했다.
이러한 사법 왜곡의 관행은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을 간첩과 반국가사범으로 몰아넣는 비극을 양산했다.
국가 공권력이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를 벗어나 밀실에서 행사될 때 사회 전체가 어떻게 병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징표였다. 당시 정보부 요원들은 스스로를 국가의 수호자라 착각했지만, 실상은 독재 권력의 사병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제도적 견제 장치가 사라진 권력기관의 폭주는 필연적으로 무고한 희생자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문세광 사건과 『산자여 말하라』의 탄생
1974년 8월 15일 발생한 문세광의 육영수 저격 사건은 유신 정권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대사의 거대한 분수령이었다. 사건 당일의 긴박했던 상황과 이후의 수사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권력이 어떻게 사실을 왜곡하고 책임을 전가했는지 그 치밀한 공작의 흔적이 역력하다.
사건 이후 정부가 발표한 공식 수사 결과는 많은 의문점을 남겼고, 실제 현장에서 수사를 지휘하거나 관여했던 요원들 사이에서도 정권 차원의 은폐와 조작이 있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이른바 '송재반' 등으로 불리며 내부에서 통제되던 극비 정보들은 철저히 비밀의 장막 뒤에 숨겨졌다.
이러한 수사 단계의 왜곡을 내부에서 직접 목격한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 최종선 씨는 훗날 『산자여 말하라』라는 회고록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이 저작은 훗날 영화 『암살자들』의 핵심 모티브가 되었으며, 영화감독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영상화되는 과정에서도 원작의 내용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왜곡된 공식 역사에 맞서 내부 고발자가 남긴 기록이 대중문화의 형태로 부활한 셈이다.
수사 출발점부터 조작된 오염된 자료를 토대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진실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었다. "주어진 자료가 순수한 자료가 아닌 것을 가지고 만들다 보니 내용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상과는 다르게 왜곡되었다"는 최종선 씨의 지적처럼, 권력이 의도적으로 흘린 불순한 기록을 걷어내지 않는 한 비극의 참모습은 영원히 봉인될 수밖에 없다.
2016년과 2017년을 거치며 마침내 터져 나온 그의 고백은 오염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 오염된 공문서가 낳은 역사의 왜곡
독재 정권이 밀실에서 조작해 낸 수사 자료는 반세기가 지난 뒤에도 다큐멘터리와 역사 연구를 오염시키는 독버섯으로 작용한다.
출발점부터 날조된 정보부의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때, 피해자는 두 번 죽고 가해자의 논리는 정당화된다.
최종길 교수 의문사와 국가폭력의 민낯
감찰실 요원이 된 동생과 서울법대 교수 형
1972년, 최종선 씨는 중앙정보부 정규 과정 9기를 수석으로 입사한 엘리트 요원이었다. 1년 이상의 혹독한 특수 훈련을 거쳐 기관 내부의 비리와 기강을 감시하는 핵심 부서인 중정 감찰실에 배치되었다.
국가에 봉사한다는 자부심과 반공이라는 시대적 이데올로기는 그의 사고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친형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저명한 법학자 고(故) 최종길 교수였다. 독일 튀빙겐 대학교 등에서 유학하며 선진 법학 체계를 익히고 돌아온 지식인이었다.
당시 유신 정권은 독일 유학생 네트워크를 표적으로 삼아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기획하고 있었고, 중정 대공수사국 5국 10과(공작과)는 최종길 교수를 수사의 디딤돌로 활용하려 은밀히 접근해 왔다.
현역 보안사에서 파견 나온 공작과장 안흥령 중령은 감찰실 소속이던 최종선 요원에게 정중한 태도를 취하며 접근했다. "최종길 선생님 안녕하십니까"라며 예의를 차리던 그들은 독일 유학생 정보를 파악하는 데 최종길 교수의 도움을 받고 싶다며 가벼운 면담을 요청했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 국가안보에 협조하는 것이 지식인의 당연한 도리이자 공직자의 충정이라 믿었던 동생은 형을 설득해 중정의 손을 잡게 만들었다.
남산 고문실에서 벌어진 참극과 은폐
그것이 평생을 짓누를 파멸의 덫이 될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최종선 요원은 형을 중정 대공수사국 요원들에게 넘겨준 셈이 되었고, 그것이 국가를 위한 헌신이라는 순진한 믿음은 불과 3일 만에 산산조각 났다.
3일 뒤 감찰실 감찰과장으로부터 전해 들은 소식은 형이 남산 청사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
진실은 명백한 고문치사였다. 유럽 간첩단 조작에 협조하지 않고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지키려 했던 최종길 교수는 무자비한 구타와 전기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다.
정보부는 사망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화장실 창문 밖으로 시신을 던져 자살로 위장 발표했다. 당시 수사를 자행하고 은폐에 가담했던 인물들은 수사관 김상훈, 최철권, 고병훈을 비롯해 안흥령 과장, 장성록 수사단장, 안경상 대공수사국장, 조일제 차장보, 그리고 훗날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치열 차장이었다.
가장 믿었던 국가 조직이 자신의 친형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 파멸시키는 과정을 목도한 한 인간의 내면은 잿더미로 변했다.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으며, 그 죄책감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라는 고백은, 국가폭력의 하수인으로 동원되었던 개인이 짊어져야 했던 영혼의 파괴를 처절하게 증언한다.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이 개인의 존엄성을 어떻게 유린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 숫자로 보면
중정 9기 수석 입사, 교육 기간 1년 이상, 그리고 형을 넘겨준 지 단 3일 만에 돌아온 싸늘한 주검.
단 한 사람의 무고한 교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남산의 지휘 체계에는 수사관 3명, 과장, 단장, 국장, 차장보, 차장까지 최소 8명 이상의 핵심 간부들이 얽혀 있었다.
언론의 입을 틀어막은 유신 독재의 폭압
동아일보 검열과 백지광고의 저항
정보부의 공포 정치는 대학가와 연구실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회의 공론장을 파괴하기 위해 가장 집요하게 자행된 것은 언론에 대한 전방위적 탄압이었다.
박정희 유신 독재 체제에서 신문사는 더 이상 진실을 전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매일 밤 문화공보부와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각 언론사 편집국에 상주하며 기사의 제목부터 단어 하나하나까지 붉은 펜으로 난도질했다.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의 기자들은 기사가 삭제당할 때마다 다른 기사를 땜질해 채워 넣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검열관들의 무자비한 가위질은 지면의 공백을 메울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인쇄소 회전판이 돌아갈 때 신문에는 기사가 삭제된 텅 빈 네모 칸, 즉 하얀 백지 상태로 활자 없는 신문이 발행되는 초유의 사태가 빈번하게 벌어졌다.
시민들은 활자가 거세된 백지 신문을 보며 권력의 칼날이 언론의 목을 조르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인지했다. 1973년 언론자유수호선언을 기점으로 더욱 거세진 저항의 흐름 속에서, 1974년 10월 24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선언이 터져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정권은 이에 대응해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는 기업들을 정보부로 끌고 가 협박했고, 전례 없는 '광고 탄압'이라는 비열한 경제적 보복을 가했다. 진실을 갈망하던 시민들이 직접 사비로 격려 광고를 채워 넣었던 '백지광고 사태'는 한국 언론 운동사에 빛나는 저항의 기념비로 남았다.
피눈물 흘리던 기자들과 침묵을 강요당한 사회
당시 편집국과 취재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전쟁터였다. 자유 언론을 부르짖다 정보부 요원들에게 끌려가 지하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해직된 언론인들이 부지기수였다.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 줄도 쓰지 못하고 펜을 꺾어야 했던 기자들의 내면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각인되었다.
"피눈물이 나는데 가서 호소할 데가 아무 데도 없었다"는 회고는 유신 치하를 살아가던 모든 지식인과 언론인의 비통한 심경을 한마디로 응축한다. 국가 권력이 사법부와 언론, 수사기관을 완벽하게 틀어쥐고 있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공적 통로는 전무했다.
폭력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던 여론조차 정보부의 철벽 검열에 막혀 있었다.
언론의 입이 봉쇄되자 유신 체제의 부패와 인권 유린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다. 감시견의 역할을 상실한 언론 환경 속에서 권력은 더욱 오만해졌고, 민간인을 향한 감시와 폭력은 일상적인 통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펜을 쥔 자들이 침묵을 강요당할 때 사회 전체가 어떻게 전체주의의 암흑 속으로 침잠하는지를 유신 독재의 언론 탄압은 뼈아픈 입증한다.
민간인 미행 감시와 일상화된 공포 정치
소공동의 비극과 결단의 순간
형의 비극적인 사망 소식을 최종선 요원이 처음 접한 장소는 서울 소공동의 한 사무실이었다. 정보부 내부의 은밀한 살인극이 벌어지던 그 시각, 그는 외부에서 형 최종길 교수와 함께 긴밀한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사망 통보가 날아들었을 때, 곁에 있던 다른 동료의 눈빛은 순식간에 맹렬한 분노로 타올랐다.
"싸우자는 거야"라는 거친 외침이 방 안을 갈랐다. 그것은 독재 권력의 야만적인 폭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절박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법과 제도를 집어삼킨 남산 중앙정보부라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감찰실 요원으로서 정보부의 잔혹한 생리와 막강한 권력을 뼛속 깊이 알고 있던 최종선 씨는 감정적인 대응이 자살행위와 다름없음을 직감했다.
싸워서 이길 수 없는 판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은 파멸만을 부를 뿐이었다. 그는 분노하는 동료를 진정시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형님, 잘 보호해라. 이제부터 내가 이 문제를 수습한다." 자신이 직접 정보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 진상을 파악하고, 남아 있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고독하고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하겠다는 비장한 결단이었다.
'암살자'라 불리며 버텨낸 감시와 미행
진실을 은폐하려는 중앙정보부 수뇌부에게 내부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감찰실 요원 최종선은 가장 위험한 뇌관이었다. 그는 정보부 청사로 직접 걸어 들어가 수뇌부와 대치하며 상황을 수습하려 시도했다.
동료 요원들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그를 향한 시선에는 살의와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다.
정보부는 그를 요주의 감시 대상으로 분류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조직 내부에서 그는 정권의 심장을 겨눌지도 모르는 잠재적 적, 즉 '암살자'라는 코드명으로 불리며 철저한 미행과 도청의 대상이 되었다.
골목길을 돌아설 때마다 따라붙는 수상한 그림자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불길한 잡음 속에서 그는 일상적인 공포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언제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형처럼 의문사로 둔갑해 죽을지 모른다는 극도의 압박감 속에서도 그는 결코 도망치지 않았다. 특수 교육을 받은 정보부 요원의 감각을 곤두세워 감시망의 틈을 파고들었고, 끊임없이 추적자들을 따돌리며 형의 죽음에 얽힌 진실의 조각들을 하나씩 수집해 은밀히 기록해 나갔다.
그 지독한 고립과 감시의 세월을 견뎌낸 힘은, 형을 죽음으로 몰어넣었다는 참회와 언젠가 역사의 심판대에 진실을 올리겠다는 집념뿐이었다.
💭 개인적인 생각
국가폭력의 참담한 본질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르는 이분법마저 처참하게 무너뜨린다는 점에 있다. 중정의 촉망받는 엘리트 요원이었던 최종선 씨는 국가에 충성한다는 자부심으로 형을 설득해 기관에 넘겼지만, 그 결과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혈육을 고문실의 제물로 바친 꼴이 되고 말았다.
독재 권력은 이처럼 개인의 선의와 직업적 윤리마저 가장 추악한 비극의 도구로 악용한다.
오늘날 권력기관 개혁과 검찰·정보기관에 대한 문민통제가 왜 그토록 중요한 민주주의의 과제인지, 이 비극적인 가족사를 보며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 견제받지 않는 국가 권력은 언제든 다시 괴물로 변해 국민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다.
역사를 잊은 사회는 그 잔혹한 폭력을 반드시 되풀이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자주 묻는 질문
Q.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1973년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정의 독일 유학생 간첩단 조작 수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다가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그가 간첩 혐의를 자백하고 남산 청사 화장실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으나, 훗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을 통해 잔혹한 고문치사였음이 명백히 밝혀졌다.
Q. 동생 최종선 요원은 왜 『산자여 말하라』를 집필했나요?
자신의 손으로 형을 설득해 정보부에 넘겨주었다는 평생의 죄책감을 씻고, 왜곡된 공식 수사 발표와 날조된 기록의 진실을 후대에 증언하기 위해 집필했다. 이 책은 훗날 영화 『암살자들』의 핵심 모티브가 되었으며 유신 체제 중앙정보부의 민간인 학살을 고발하는 결정적 문헌이 되었다.
Q. 당시 중앙정보부의 언론 탄압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정보부 요원들이 신문사 편집국에 상주하며 기사를 사전 검열하고 강제 삭제했다. 이에 맞서 동아일보 기자들이 저항하자 신문 지면이 하얗게 비어 있는 백지 신문이 발행되었고, 정권은 언론사를 굴복시키기 위해 광고주들을 협박하는 광고 탄압을 자행하며 여론의 입을 철저히 틀어막았다.
어두웠던 유신 시절, 남산의 지하실에서 벌어진 무자비한 고문과 조작, 그리고 언론을 향한 가위질은 결코 박제된 옛이야기가 아니다. 헌법이 부여한 공권력을 사유화하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적으로 돌리며 민간인을 사찰하려 했던 그 시절의 망령은, 제도를 통한 끊임없는 감시와 시민사회의 깨어있는 연대가 없을 때 언제든 다른 얼굴을 하고 되살아날 수 있다.
한평생 피눈물을 흘리며 진실을 증언한 전직 요원의 고백을 거울삼아, 우리가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야 할 때다.
권력이 진실을 영원히 묻어둘 수 있다고 믿을 때, 역사는 침묵하던 자들의 입을 열어 끝내 그 민낯을 드러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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