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이라는 거인의 삶을 무대 위로 소환하려는 파격적인 시도가 시작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 발표된 문익환 목사 창작희곡 공모는 단순한 문학상이 아니라 박제되어 가던 민주화와 통일의 역사를 살아 숨 쉬는 오늘의 이야기로 되살려내기 위한 문화적 결단이다.
봉하마을 추모식에서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찾아오지 않겠다며 스스로 엄격한 긴장감을 부여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뒷모습을 보며 느꼈던 그 처연함처럼, 역사의 무거운 짐을 온몸으로 짊어졌던 어른들의 궤적은 늘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권력을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마음껏 슬퍼할 수 있었던 정치인의 고뇌 뒤편에는, 평생을 감옥과 아스팔트 위에서 보내면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통일을 향한 열망을 놓지 않았던 문익환 목사의 서슬 퍼런 발자취가 오롯이 겹쳐진다.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인물이 세상을 떠난 지 30여 년이 흘렀지만, 분단이라는 거대한 모순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그를 기리는 추도식에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추모의 행렬이 이어진다.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정권의 입맛에 따라 지워지고 왜곡되기를 반복하는 현실 속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 작품 하나로 그 거대한 인간을 증언하겠다는 결심은 왜 지금 우리에게 이토록 뜨겁게 다가오는 것일까.
30년을 품어온 무대, 문익환 목사 창작희곡 공모가 던진 질문
총상금 1억 원과 파격적인 공모 조건에 담긴 진심
총상금 1억 원이라는 규모 자체도 놀랍지만, 이번 문익환 목사 창작희곡 공모전이 내건 조건들을 가만히 뜯어보면 주최 측이 얼마나 절박하게 완성도 높은 무대 공연물을 갈망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기성 작가와 신인 작가의 경계를 완전히 허문 것은 물론이고, 정통 연극 대본에 국한하지 않고 뮤지컬, 시극, 음악극, 종교극 등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공연 대본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감 기한 역시 2027년 12월 31일까지로 무려 14개월 이상의 넉넉한 시간을 부여했으며, 심지어 작가가 영감을 받아 써 내려가는 즉시 제출할 수 있는 수시 접수 방식으로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이러한 파격적인 형식의 배후에는 심사위원장을 맡은 이창동 감독의 엄격한 예술적 잣대와 함께, 문학동네가 최종심에 오른 다섯여섯 편의 우수작들을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하기로 약속한 실질적인 협력이 자리 잡고 있다. 공모전의 당선작 한 편에만 조명을 비추고 끝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다양한 시선으로 해석된 문익환의 파편들을 세상에 널리 퍼뜨려 대학로나 종교 단체, 청년 극단 등 어디서든 무대화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겠다는 의도다. 응모 시 본명이 아닌 가명을 써도 무방하고 오직 작품 자체의 밀도와 텍스트의 생명력만으로 평가하겠다는 선언은, 화려한 이력 뒤에 숨은 안일함을 거부하고 진정한 예술적 혼을 건져내겠다는 결의로 읽힌다.
결국 무대 위에 올라가는 순간 관객의 숨통을 틀어쥐고 시대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가 이번 공모의 가장 본질적인 기준이다.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관객을 꼼짝없이 어두운 객석에 붙잡아두고 치열한 사상적 논쟁과 영혼의 울림을 전면에서 부딪치게 만드는 장르는 오직 무대 예술뿐이다. 제작비의 타산을 맞추면서도 대학로 한복판에서 관객을 전율케 할 치열한 희곡 한 편을 찾아내기 위해, 주최 측은 가장 열려 있으면서도 가장 가혹한 시험대를 예술가들에게 내던진 셈이다.
💡 문익환 창작희곡 공모의 핵심 포인트
- 총상금 1억 원(1~2편 선정)과 심사위원장 이창동 감독의 철저한 완성도 검증
- 2027년 12월 31일까지 장르 불문, 수시 접수로 진행되는 파격적인 공모 방식
- 최종심 진출작의 문학동네 단행본 출간을 통한 지속 가능한 공연 인프라 구축
형 문옥근과 동생 문성근, 30년 동안 전하지 못한 무대의 꿈
아버지를 무대로 불러내겠다는 열망은 사실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가족사적 숙원이었다. 뛰어난 연출가였던 형 문옥근과 무대와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던 동생 문성근은 1990년 무렵부터 문익환이라는 거대한 삶을 희곡으로 엮어내기 위해 수없이 고뇌했다. 당시 옥중에 계시던 문익환 목사를 면회하러 간 자리에서, 문옥근 연출가가 혹시 어린 시절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동주 시인, 장준하 선생과 셋이 함께 만난 적은 없었느냐고 물었던 일화는 그 지난했던 고민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난 만난 적은 없어. 따로따로지"라는 아버지의 담담한 대답에 아쉬움을 삼키며, 세 거인이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 상상력을 무대 위에서 펼쳐보고 싶어 했던 예술가 아들의 갈증은 끝내 온전한 대본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동생 문성근 역시 지난 15년 동안 어떻게든 스스로 대본을 써보려고 펜을 쥐었지만, 가족이라는 너무나 가깝고 애틋한 거리감 탓에 번번이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살아생전 아버지의 숨결과 고통을 곁에서 지켜본 핏줄로서는 객관적인 예술적 거리를 확보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서로 깊은 속내를 터놓고 상의하지는 않았지만, 두 형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향한 일종의 거룩한 부채감을 품고 살았던 것이다.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심정으로,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를 위한 시대의 예술 작품 하나는 기필코 남겨놓아야 한다는 그 절절한 자책과 사명감이 이번 공모전을 세상에 밀어 올린 보이지 않는 동력이었다. 이제 가족의 사적인 회한을 넘어,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을 지닌 당대 최고의 작가들의 손에 아버지의 영혼을 온전히 맡기겠다는 결단이 내려진 것이다.
닫힌 문을 부수고 거리로 나온 지식인의 내면적 투쟁
신경질적인 학자 '문이 쾅'에서 민중의 벗으로 변모한 궤적
대중이 기억하는 문익환 목사는 백발을 휘날리며 군사독재에 맞서 사자후를 토해내던 강철 같은 투사이지만, 1970년대 중반 이전의 그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닌 인물이었다. 한신대학교 교수 시절 그의 별명은 다름 아닌 '문이 쾅'이었다. 강의실 문이 쾅 닫힌다는 뜻으로, 과제 제출 마감 시간이 오후 5시라면 5시 10분에 헐레벌떡 뛰어온 제자의 리포트를 가차 없이 거절할 만큼 융통성 없고 원칙에만 얽매인 꼬간 학자였다.지독한 고혈압으로 인해 40대 후반에 이미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을 정도로 그의 신경은 언제나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집안에서도 자녀들이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늘 발걸음을 조심해야 했고,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 만큼 엄격하고 폐쇄적인 가부장이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옹졸하고 신경질적인 천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 고약한 기질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하며 자책하던 고독한 지식인이 바로 청년기 문익환의 본모습이었다.
그러나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된 이후, 감옥이라는 극한의 공간을 통과해 나온 그는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감옥 문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평생 동안 집의 대문을 활짝 열어둔 채 누구든 찾아와 쉬어갈 수 있게 품어주는 거대한 바다가 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타고난 천성은 결코 바뀌지 않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성격의 덫에 걸려 운명적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문익환은 자신의 성정을 역사적 필요와 민중의 아픔에 맞추어 송두리째 뜯어고친 보기 드문 존재였다. 닫혀 있던 '문이 쾅'의 문을 스스로 부수고 광장으로 걸어 나온 이 경이로운 자기 부정의 과정이야말로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인 내면의 투쟁이었다.
🔥 지식인의 안락함을 찢고 광장으로 향한 이유
서재의 평온함 속에서 성경 원문을 번역하던 고결한 학자가 최루탄이 빗발치는 거리로 뛰어나온 것은 지적 허영이 아니었다. 죽어간 동무들에 대한 부채감과 고통받는 민중의 비명을 외면할 수 없었던 영혼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자신의 옹졸한 껍질을 스스로 깨뜨리지 못하는 지식인은 결코 역사의 증인이 될 수 없다.
윤동주와 장준하의 부채의식, 그리고 구약성경 공동번역의 완성
문익환의 극적인 변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평생 동안 심장 깊숙이 묻어두었던 두 개의 거대한 묘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한 영혼의 벗 윤동주였고, 다른 하나는 유신독재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서 의문의 죽임을 당한 사상계의 거두 장준하였다. 윤동주의 죽음을 가슴에 안고 평생을 죄인처럼 숨죽여 살았던 그는, 1975년 장준하마저 차가운 벼랑 끝에서 주검으로 돌아오자 마침내 억눌러왔던 울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그가 70년대 중반까지 거리로 뛰쳐나오지 못하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던 데에는 피치 못할 절대적인 사명이 존재했다. 바로 1968년 당시 가톨릭과 개신교가 뜻을 모아 첫발을 내디딘 구약성경 공동번역 작업이었다. 긴 분열의 역사를 넘어 우리말 성경을 완성하려던 이 역사적인 프로젝트는 그에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거룩한 멍에였다. 로마 교황청이 자국어 번역을 허용한 이래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빠르게 진행되던 우리말 번역 프로젝트였고, 당대 최고의 구약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문익환에게 이 작업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완수해야 할 필생의 과업이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을 듣고 남몰래 청계피복노조를 찾아가 이소선 여사에게 밥을 사고 눈물을 훔치면서도, 그는 성경 번역을 끝마치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침묵을 견뎌냈다.
하지만 장준하의 죽음은 그 모든 학문적 인내의 둑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더 이상 서재에 안주하는 것은 먼저 간 벗들에 대한 배신이자 신앙에 대한 기만이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당시, 문익환은 성경 번역을 끝까지 마무리 짓기 위해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고도 정작 서명 명단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뺐다. 안병무 박사와 동생 문동환 목사가 먼저 감옥에 들어가면 자신이 번역을 마친 뒤 뒤따라 들어가겠다는 치밀한 계산이었다. 그러나 심장 질환을 앓던 안병무 박사가 수사 과정에서 위태로워지자, 결국 문동환 목사가 약속을 깨고 "사실은 형님이 썼다"고 자백하면서 문익환의 운명은 완전히 아스팔트와 감옥으로 내던져지게 되었다. 하늘이 내린 사명과 시대의 절규가 맞물려 폭발한 역사의 필연이었다.
법정과 감옥에서 피어난 인간에 대한 처절한 사랑
90세 노모 김신묵 여사의 외침과 북간도 이주사의 뿌리
1989년 평양을 전격 방문하여 분단된 한반도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던 문익환 목사가 귀국 직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첫 공판을 받던 날, 법정 안에서는 실로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방청석 한구석에는 아흔을 훌쩍 넘겨 몸이 종이 인형처럼 작게 쪼그라들고 등마저 굽은 노파가 앉아 있었다. 바로 문익환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였다.피고인 문익환이 포승줄에 묶인 채 법정으로 들어서는 순간, 후 불면 날아갈 것만 같던 아흔 살의 어머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 법정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사자후를 토해냈다. "이카나! 당당하게 재판을 받아라! 예수님이 골고다에 올라가듯이 재판을 받아!" 일흔 살 먹은 백발의 아들을 향해 평생의 애칭인 "이카나"를 부르며 골고다 언덕의 예수를 기억하라고 호통치던 그 순간, 법정은 일순간에 거룩한 종교적 제단으로 변모했다. 칠순의 투사 문익환은 그 어머니의 품 안에서는 여전히 민족의 십자가를 져야 할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이 서슬 퍼런 기백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1899년 당시 함경도를 떠나 거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명동촌에 새로운 터전을 일구었던 문제린 장로와 김신묵 여사의 발자취는, 훗날 민족과 신앙을 지켜낸 가문의 뼈대가 되었다. 훗날 손녀 문영미에 의해 『기린가비와 고마의 꿈』이라는 자전적 기록으로 묶여 나온 이 가문의 역사는 단순한 족보를 넘어 만주 벌판의 삭풍을 견뎌낸 한민족 문명사의 압축판이었다. 북간도의 광활한 벌판에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젖줄 삼아 자라난 문익환이었기에, 백척간두의 법정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초인적인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셈이다.
📊 기록으로 증명되는 문익환의 수난사
문익환 목사는 생애 마지막 17년 중 무려 10년 3개월을 차디찬 감옥 안에서 보냈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2회,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2회, 노태우 정권 시절 2회 등 독재 권력이 바뀔 때마다 정확히 두 번씩, 총 여섯 번의 투옥을 겪으며 민주주의와 통일의 제단에 자신의 노년을 온전히 갈아 넣었다.
노조 집회에서 터져 나온 파격적인 사랑학 강의의 진실
문익환이라는 인물의 진면목은 거창한 정치적 연설보다 오히려 노동자들과 호흡하던 민중의 현장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났다. 1990년대 초반의 어느 날 저녁, 한 노동조합 강연회에 연사로 서기로 했던 그는 밤 10시가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안기부와 경찰의 미행을 따돌리느라 오도가도 못하거나 중간에 연행되는 일이 다반사였던 야만의 시절이었기에, 노동자들은 그가 체포되었을 것이라 짐작하며 자체 집회를 이어가고 있었다.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 숨을 헐떡이며 강당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온 일흔 살의 노목사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전혀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딱 한 가지만 묻겠다며, 처녀 총각들은 손으로 귀를 막으라고 하더니 다짜고짜 기혼 노동자들을 향해 소리친 것이다. "당신들, 부부간에 일주일에 몇 번씩 사랑을 나눠?" 경악과 당혹감 속에 강당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지자, 목사는 특유의 해맑은 표정으로 일갈했다.
"왜들 그래, 젊은 사람들이? 사랑은 나눌수록 깊어지는 거야. 열심히 사랑해야 된단 말이야! 나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해!" 엄숙주의에 찌들어 있던 노동 현장은 순식간에 폭소와 눈물 어린 박수로 뒤집어졌다. 그리고 목사는 "사랑들 열심히 해!"라는 단 한마디를 남긴 채 바람처럼 사라졌다. 훗날 도봉산 등산로에서 만난 한 중년의 노동자 부부가 그날 밤 목사님의 충격적이면서도 따뜻했던 말씀 덕분에 평생을 서로 아끼며 행복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고 아들에게 고백했던 일화는, 문익환의 사상이 거대 담론에 갇힌 먹물의 철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살과 피를 지닌 '생명과 사랑의 온기'였음을 웅변한다.
80년 광주와 민통련, 분단 극복을 향한 멈추지 않는 걸음
지식인 운동에서 기층 민중운동으로, 스스로를 깨뜨린 광대
1980년 5월 광주학살은 문익환이라는 지식인의 세계관을 밑바닥부터 다시 한번 뒤흔들어놓았다. 1970년대까지의 민주화 운동이 대학교수, 성직자, 문인 등 명망가 중심의 지식인 운동이었다면, 광주의 피비린내를 목도한 이후의 시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투쟁을 요구하고 있었다. 청년 학생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민중해방론을 치열하게 학습하며 비타협적인 변혁을 모색하고 있었고, 보수적인 기성세대의 눈에는 이들의 급진성이 몹시도 위태롭고 불온해 보였다.이 위험한 시대의 균열대 한가운데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간 인물이 바로 문익환이었다. 그는 1985년 학생운동, 청년운동, 노동자·농민의 기층 민중운동을 총망라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대 규모의 재야 연대체, 즉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창립하고 초대 의장을 맡았다. 지식인의 고결한 연구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혈기 넘치는 20대 청년 투사들과 땀 냄새 나는 노동자들의 손을 맞잡으며 기성세대의 지혜와 청년세대의 뜨거운 에너지를 묶어내는 거대한 용광로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영화감독 이창동이 배우 문성근을 향해 "당신은 잽이 안 돼. 당신 아버지는 진짜 큰 광대야"라고 평했던 대목은 실로 핵심을 찌른다. 광대란 자신의 자존심과 고통을 바닥에 내던져 대중의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역사의 한을 온몸으로 풀어내는 제사장의 다른 이름이다. 문익환은 자신의 성격적 결함과 지식인 특유의 오만을 역사의 요구에 맞추어 사정없이 깨부수며, 억압받는 민중이 마음껏 올라타 뛰어놀 수 있는 가장 넓고 튼튼한 무대가 되어준 진정한 광대였다.
🔥 지워지는 역사, 그리고 예술의 책무
근현대사 교과서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던 문익환 목사의 통일 발자취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대폭 축소되었고, 급기야 내란 세력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 윤석열 씨 집권 시절에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만큼 철저하게 지워졌다.
권력이 교과서를 난도질하여 역사의 기억을 지우려 할 때, 시대를 뛰어넘어 진실을 증언하는 불멸의 예술 작품을 남기는 것은 살아남은 우리 모두의 준엄한 책무다.
10년 3개월의 옥고와 여전히 선반 위에 올리지 못한 통일의 숙제
문익환의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한 운명은 그가 짊어졌던 과제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절차적이고 제도적인 민주주의는 일정한 전진을 이루어냈다. 그의 1차부터 4차까지의 수감 생활이 독재 타도와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에 복무한 것이었다면,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미 서재의 선반 위에 자랑스럽게 얹어둘 수 있는 영광스러운 훈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그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투옥을 초래했던 분단 극복과 평화 통일의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 피를 흘리고 있다. 남북 관계의 대화와 화해를 모색했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의 뼈를 깎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냉전 구조는 여전히 청문회장마다 "주적이 누구냐"를 따져 묻는 광기 어린 색깔론의 덫에서 한 걸음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문익환의 삶은 영광스러운 과거 완료형의 역사로 박제될 수가 없다. 정권이 바뀌고 수구 보수 세력이 득세할 때마다 가장 먼저 지워지는 이름이 문익환인 이유도, 그가 던진 통일이라는 화두가 여전히 기득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현재진행형의 뇌관이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도록 마석 모란공원의 추도식에 모여드는 인파가 결코 줄어들지 않는 까닭은, 그가 남긴 10년 3개월의 옥고가 아직도 우리 가슴속에서 채 갚지 못한 무거운 빚으로 펄떡이기 때문이다.
큰 어른이 사라진 시대, 문익환의 여백이 우리에게 남긴 것
"연기에는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
아들이 연극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아버지는 뜻밖에도 진심으로 기뻐했다. 영화 『경마장 가는 길』 등으로 배우로서 이름을 날리던 아들에게, 어느 날 아버지는 불쑥 가슴을 후벼파는 묵직한 가르침 하나를 건넸다. "연기에는 여백이 있어야 된다." 매 순간 배역에 몰입해 빈틈없이 치열하게 연기하는 것만이 최선이라 믿었던 젊은 배우에게, 아버지가 던진 '여백'이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거대한 화두였다.그 여백의 참뜻은 완벽하게 채워 넣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관객이 들어와 함께 호흡하고 사유할 수 있는 숨구멍을 열어두라는 성찰이었다. 자신이 옳다는 독선과 모든 것을 다 쏟아붓겠다는 과도한 긴장을 내려놓을 때라야 비로소 타인의 아픔이 그 빈자리에 스며들 수 있다는 지혜였다. 아버지는 좁은 틀 속에 갇혀 아등바등하던 아들의 과도한 긴장감을 단박에 꿰뚫어 보고, 삶과 예술 모두에서 스스로를 비워내는 여백의 미학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문익환의 전 생애야말로 거대한 여백의 실천이었다. 90세 노모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서 있던 여백, 노동자들에게 사랑을 나누라며 웃음 짓던 파격의 여백, 그리고 자신을 가두었던 군사독재의 교도관들마저 품어 안았던 그 거대한 비움이 있었기에 그는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끝내 파멸하지 않고 큰 어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오늘날 자기주장과 혐오만이 가득 차 숨 막히는 이 극단의 시대에, 문익환이 남긴 여백의 울림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서늘하게 다가온다.
💭 거인이 부재한 난쟁이들의 시대를 돌아보며
취업 문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과 살인적인 물가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30대의 눈으로 바라보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참으로 삭막하다. 함석헌, 안병무, 문익환처럼 시대를 호흡하며 길을 밝혀주던 '큰 어른'들은 모두 떠나갔고, 그 빈자리는 상대를 악마화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왜소한 모리배들이 차지해 버렸다.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남북 화해를 이끌던 김대중·노무현의 정신은 짓밟히기 일쑤였고, 촛불의 열망으로 세워졌던 민주주의의 가치는 지난 세월 뼈아픈 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역사의 거목들이 감옥 속에서 고난을 뚫고 끝내 자기를 변화시켜 나갔던 그 처절한 기록을 되새길 때, 우리는 다시금 절망을 털어내고 일어설 용기를 얻는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거인의 발자국은 더욱 또렷해지는 법이다.
정권 교체를 보지 못하고 떠난 거인에게 바치는 뒤늦은 참회
1994년 1월, 문익환 목사는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던 수평적 정권 교체의 역사적 순간을 끝내 두 눈으로 보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여섯 번이나 투옥되며 10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썩어야 했던 그에게, 민주 정부의 출범을 단 한 번도 보여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살아남은 후대들에게 씻을 수 없는 회한과 죄송함으로 남아 있다.노사모 활동을 하며 전국을 순회하던 시절, 어느 지방의 한 노동자가 찾아와 건넸던 고백은 실로 뼈아프다. "문익환 목사 아들이라는 사람이 영화에 나와 발가벗고 베드신이나 찍고 돌아다니는 걸 보며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강연을 듣고 나니 이제야 당신을 진심으로 용서하겠다"는 그 투박하고 솔직한 말 속에는, 문익환이라는 이름 석 자가 당대 민중들에게 얼마나 무겁고 거룩한 상징이었는지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를 묵묵히 짊어지고 가야 했던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 역시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깊이였을 것이다.
비록 그는 첫 민주 정부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그가 뿌린 피와 눈물의 씨앗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의 6·15 남북공동선언과 노무현 정부의 10·4 남북정상선언,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판문점 선언으로 이어진 화해와 번영의 도도한 물줄기는 모두 1989년 평양의 얼어붙은 땅을 녹였던 문익환의 담대한 발걸음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비록 역사가 역주행하고 야만의 시기가 닥쳐오더라도, 진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던 거인의 뒷모습은 언제나 어둠을 밝히는 등대로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 자주 묻는 질문
Q. 문익환 목사 창작희곡 공모전의 마감 일정과 응모 자격은 어떻게 되나요?
기성 및 신인 작가의 구분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연극은 물론 뮤지컬, 시극, 음악극 등 공연 가능한 모든 형태의 대본을 대상으로 합니다. 마감은 2027년 12월 31일까지로 넉넉하게 주어지며, 원고가 완성되는 대로 상시 제출할 수 있는 수시 접수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Q. 공모전의 선정 규모와 수상작에 대한 혜택은 무엇인가요?
총상금 1억 원 규모로 1편 또는 2편의 최종 당선작을 선정하며, 세계적인 거장 이창동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아 엄정하게 심사합니다. 또한 본심 및 최종심에 오른 우수작 5~6편은 문학동네를 통해 공식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다양한 극단에서 지속적으로 공연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입니다.
Q. 문익환 목사는 실제로 옥고를 얼마나 치렀나요?
문익환 목사는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1989년 방북 사건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거치며 각각 두 번씩, 생애 마지막 17년 중 총 여섯 번에 걸쳐 10년 3개월 동안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과거의 거인들을 그리워하며 작가진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고만 있을 것인가. 교과서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분단의 장벽이 다시금 견고해지는 절망의 계절 속에서도, 문익환이 남긴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여전히 사랑하고 타협 없이 전진하라고 조용히 귓전을 울린다.
이제 공은 무대라는 거룩한 사각 링 위에 뛰어들 예술가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서재를 찢고 나와 민중의 심장 속으로 뛰어들었던 한 인간의 서슬 퍼런 투쟁과 뜨거운 사랑이, 1억 원의 상금보다 더 값진 불멸의 희곡 한 편으로 환생하여 우리 가슴을 다시금 뒤흔들어 놓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광대가 되어 역사의 십자가를 짊어졌던 그 사람, 문익환이 남긴 여백을 우리는 이제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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