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가 말하는 술의 본질, 왜 혼자 마시면 안 되는가

퇴근길 편의점에 들러 네 캔에 만 원 남짓 하는 캔맥주를 집어 들거나, 작은 원룸 식탁에 앉아 초록색 소주병 뚜껑을 돌려 따는 풍경은 이제 우리 세대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하루 종일 시스템의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며 온갖 눈치와 피로를 견뎌낸 뒤, 오롯이 나만의 방으로 돌아와 들이켜는 차가운 알코올 한 모금은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유일한 해방구처럼 느껴지곤 한다.

이른바 '혼술'은 번잡한 인간관계의 피로에서 벗어나 나를 위로하는 낭만적이고 안전한 쉼표로 포장되어 왔다. 🍺

하지만 그 침묵의 잔을 비워낼수록 마음 한구석에 서늘하게 고여오는 기묘한 허기와 쓸쓸함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토록 지독하게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둔 채 혼자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을까?

술이란 과연 단순한 기호식품이나 스트레스 해소용 음료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균열과 실존적 불안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일까? 철학자 박구용 교수가 던진 술의 현상학에 대한 통찰은, 매일 밤 습관처럼 잔을 채우던 내 손길을 멈칫하게 만들며 술과 인간, 그리고 고립된 현대 사회의 본질을 날카롭게 직시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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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시스템이라는 감옥과 해방의 도구로서의 술

💡 시스템의 예속과 술의 본질

  •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거대한 사회 시스템, 즉 '제2의 자연'에 길들여진 존재다.
  • 술은 뇌를 흥분시키는 자극제가 아니라, 나를 검열하고 억누르는 사회적 자아를 억제하는 장치다.
  • 단순한 도피를 넘어 본연의 자아와 마주하기 위한 섬세한 스토리텔링이 결여된 음주는 공허하다.

우리를 억제하는 나를 억제하는 역설

우리는 흔히 술을 마시면 기분이 고조되고 에너지가 솟구친다고 믿는다. 취기가 오르면 말수가 늘어나고 평소 하지 못했던 과감한 행동이나 농담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알코올을 일종의 각성제나 자극제로 착각하기 쉽다. 주류 광고들 역시 술을 젊음의 열정과 폭발적인 활력의 상징으로 묘사하며 소비자의 욕망을 부추긴다. 친구들과 부딪히는 맥주잔의 하얀 거품이나 클럽에서 터져 나오는 탄산의 궤적은 언제나 일탈의 에너지로 채색되어 있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나 신경과학적으로 볼 때 알코올은 명백한 중추신경 억제제다. 뇌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적 사고와 통제를 담당하는 전두엽의 스위치를 끄는 약리적 작용을 한다. 그렇다면 억제제를 마셨는데 어째서 우리는 흥분하고 해방감을 느끼는 것일까? 이 모순된 현상에 대해 철학자 박구용 교수는 날카로운 화두를 던진다. 술은 우리를 직접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억제시키는 걸 억제하는" 장치라는 설명이다.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현대인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신을 검열한다. 직장에서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침묵하고, 거래처의 무리한 요구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지하철 안에서 타인의 어깨와 부딪혀도 본능적인 불쾌감을 삼킨다. 이처럼 철저히 길들여지고 훈련받은 초자아(Superego), 즉 '나를 억누르는 사회적 나'의 검열 망대를 마비시키는 순간, 그 억압 밑에 숨죽이고 있던 원초적인 자아가 고개를 든다. 우리가 술자리에서 느끼는 찰나의 자유는 시스템의 규율이 잠시 허물어지면서 생겨나는 반작용인 셈이다.

헤겔의 '제2의 자연'과 현대인의 예속 상태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우리는 수만 년 전 사바나 초원이나 울창한 밀림을 누비던 수렵채집인 조상들과 유전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날카로운 맹수의 습격에 심장이 요동치고, 굶주림과 추위 앞에서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 신체 구조는 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숲속에서 맹수를 피하며 살지 않는다. 복잡한 출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고, 모니터 화면 속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보이지 않는 규범과 법률에 얽매여 살아간다.
이러한 인간 조건의 격차를 철학자 헤겔은 '제2의 자연(die zweite Natur)'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사회와 제도, 언어, 규범, 가족과 같은 인위적인 시스템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자연법칙처럼 우리 삶을 완벽하게 포섭해 버렸다는 뜻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이 거대한 체계의 노예로 길러진다. 다섯 살 난 어린아이조차 어린이집의 규칙을 익히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의 울음과 떼를 참아내는 법을 배운다. 비혼주의자나 가족 해체주의자가 제아무리 급진적인 구호를 외친다 해도 가족이라는 질서를 단숨에 벗어던질 수 없는 이유 역시 그것이 이미 인간의 무의식에 깊게 각인된 제2의 자연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겪는 일상의 스트레스와 불안은 만 년 전의 원초적 생물학적 자아와 수십만 년에 걸쳐 구축된 사회적 시스템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긴장에서 비롯된다. 시스템은 쉼 없이 효율과 순응, 성과를 요구하며 개인을 옥죈다. 그 팽팽한 긴장선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인간이 집어 드는 술 한 잔은, 제2의 자연이 씌워둔 멍에를 잠시 벗어던지고 원초적 생명성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무의식적 저항일지도 모른다.

각성증과 잠들지 못하는 생각의 사슬

박구용 교수는 스스로 20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술을 마셨던 지독한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의사들이 처방약을 건네며 술을 절대 마시지 말라고 경고해도 개의치 않고 매일 밤 잔을 채웠다는 고백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가 혼자 술을 마셔야만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불면증이 아니라 바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각성증' 때문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하고 질문이 꼬리를 물면 뇌세포가 극도로 활성화되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기에, 생각을 강제로 멈추기 위한 일종의 소화기(消火器)로서 술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 고백은 2030 청년 세대가 겪고 있는 밤의 풍경과도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서도 스마트폰의 파란 화면을 끄지 못한다. 치솟는 집값, 불안정한 일자리, 고물가와 노후에 대한 불안, 뒤처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뇌리를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피곤해서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뇌는 풀가동 상태로 공회전을 거듭하는 고통스러운 각성의 밤이다. 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맥주 캔을 따거나 독주를 들이켜며 억지로 의식의 전원을 내린다.
그러나 강제로 생각을 잠재우기 위해 들이켜는 술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 근본적인 구원이 되지 못한다. "술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는 거거든요"라는 박 교수의 말처럼, 술은 단순히 뇌의 기능을 마비시켜 도망치는 수면제가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응시하고 해석하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무작정 뇌를 끄기 위해 마시는 습관적인 음주는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쳇바퀴가 될 뿐이다. 술을 대하는 태도에 성찰이 결여될 때, 해방의 도구였던 알코올은 또 다른 지독한 예속의 굴레로 전락하고 만다.

발효의 과학과 술의 격을 결정하는 은유의 힘

🔥 술을 소비하는 천박한 태도에 대한 비판

수십만 원짜리 위스키나 와인을 마시면서 고작 "목넘김이 좋다"는 상투적인 찬사밖에 내놓지 못하는 것은 자본의 마케팅에 지갑을 털린 것에 불과하다.

스토리와 철학적 은유가 거세된 고급주는 과시욕을 채우기 위한 비싼 설탕물이나 에탄올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물과 불의 결합, 그리고 15도의 한계를 넘는 발효의 미학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철학에서 물은 만물을 잉태하고 포용하며 '모두 존재하는'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져 왔다. 반면 불은 모든 형태를 소멸시키고 태워 없애며 순수한 에센스만을 남기는 정화의 상징이다. 이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물과 불이 기묘하게 결합하여 탄생하는 물질이 바로 술이다. 곡물과 효모가 물속에서 숨 쉬며 발효되고, 여기에 열을 가해 증류하면 맑고 독한 소주가 추출된다. 소멸의 불을 거쳐 생명의 물이 영적인 기운을 품은 증류주로 거듭나는 셈이다.
자연 발효의 세계에는 넘기 힘든 절대적인 생물학적 장벽이 존재한다. 당분이 효모에 의해 분해되어 알코올로 변할 때, 알코올 도수가 대략 15도를 넘어서면 정작 알코올을 만들어내던 효모 자신이 독성을 견디지 못하고 사멸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포도주는 포도 자체에 이미 풍부한 당분이 들어있어 효모가 이를 즉각 알코올로 전환하는 단발효 방식을 취하기에, 인위적인 주정 강화나 특수 공정 없이는 15도 이상의 도수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반면 우리의 전통 누룩으로 빚는 고급 막걸리는 차원이 다른 과학을 품고 있다. 곡물의 전분이 당으로 분해되는 당화 과정과, 당이 알코올로 바뀌는 발효 과정이 한 항아리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복합발효, 즉 '이중 발효(병행복발효)'가 수행된다. 효모가 급격한 알코올 농도 상승에 충격을 받아 죽지 않도록 환경이 완충되면서, 해창막걸리와 같은 프리미엄 탁주는 알코올 도수가 18도, 20도에 이를 때까지 효모가 살아 숨 쉰다. 왜 해창막걸리 20도짜리가 시중에서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지 그 양조학적 프로세스와 효모의 사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돈 자랑 삼아 마신다면, 그 술의 진정한 가치는 증발해 버리고 만다.

목넘김의 허상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얄팍한 취향

우리는 주변에서 비싼 술을 평가할 때 흔히 "크, 이 술은 목넘김이 정말 부드러워"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본다. 면세점에서 큰맘 먹고 집어 든 조니 워커 블루 라벨이나 백화점 와인 코너의 수십만 원짜리 빈티지를 잔에 따르며 내놓는 유일한 찬사가 고작 '목넘김'이라니, 이 얼마나 빈곤한 감각인가? 박구용 교수가 지적하듯, 단지 목구멍을 부드럽게 넘어가는 감촉이 목적이라면 굳이 비싼 알코올을 마실 이유가 없다. 삼다수나 백산수 같은 깨끗한 생수를 마시는 편이 훨씬 탁월하다.
"목넘김이 좋다"는 칭찬은 주류 대기업과 상업적 마케팅이 주입한 게으른 수사에 불과하다. 값싼 주정에 감미료와 향료를 섞어 만든 희석식 소주의 거친 알코올 냄새와 역한 뒷맛에 길들여진 대중에게, 알코올 튀는 맛을 깎아내고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설계된 블렌디드 위스키는 마시기 편한 술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편안함 뒤에 숨겨진 복합적인 풍미와 오크통의 세월, 증류소의 기후와 토양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비싼 돈을 치르고도 술의 겉껍데기만 핥은 것에 다름 아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보르도 와인 역시 철저한 블렌딩의 산물이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등 여러 품종을 적절히 섞어 누구나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균형 잡힌 바디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것은 전 세계 소비자의 무난한 입맛에 맞추기 위해 극단적인 개성을 깎아낸 타협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코스트코 매대에서 집어 든 보르도 와인을 마시며 그저 "밸런스가 좋다"는 상투적인 말을 읊조리는 것은, 술을 통해 나만의 감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대량 생산 시스템의 취향에 내 혀를 끼워 맞추는 일일 뿐이다.

"사랑은 은유와 함께 시작된다": 술을 완성하는 스토리텔링

밀란 쿤데라의 불멸의 명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사랑은 은유와 함께 시작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매혹되어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은 상대의 키나 연봉 같은 객관적 지표 때문이 아니다. 갈대밭에 부는 바람처럼, 혹은 강물에 띄워 보낸 바구니 속 아이처럼, 그 사람의 존재가 내 안에서 하나의 시적 이미지와 은유로 변환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싹튼다. 술 역시 마찬가지다.
적어도 10만 원이 넘어가는 술을 마실 때는 전문가들의 뻔한 점수나 시음 노트 뒤에 숨지 말고, 나만의 독창적인 은유를 창조해 낼 수 있어야 한다. 3만 원 이하의 데일리 와인은 기계로 대량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져 편하게 목을 축이는 음료에 가깝지만, 사람의 손길과 풍토의 역사가 응축된 고가의 술을 마실 때는 그 술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여정을 음미해야 한다. "이 술은 마치 늦가을 해질녘 고속도로 갓길에 외롭게 피어난 체리 세이지 꽃잎 같다"거나, "바람 거센 해안 절벽의 이끼 낀 바위틈에서 건져 올린 소금기 같다"는 식의 감각적 서사가 따라붙어야 비로소 그 술의 본령에 가닿는다.
술의 등급은 가격표의 숫자가 아니라, 그 술이 품고 있는 출발과 과정, 즉 **'프로세스(Process)'**를 얼마나 섬세하게 언어로 복원해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3만 원짜리 작은 미니 오크통을 하나 사서 값싼 희석식 소주를 부어둔다면 어떻게 될까? 오크통 목재의 탄닌과 바닐린 성분이 우러나며 불과 일주일 만에 황금빛 위스키의 풍미를 흉내 내기 시작한다. 와인을 담갔던 중고 배럴에 증류주를 숙성시켜 복합적인 아로마를 입히듯, 술은 지나온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빨아들이며 완성된다. 술자리에 마주 앉은 이에게 이 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식탁에 올랐는지, 내가 왜 이 술을 선택했는지 스토리를 풀어낼 수 있을 때, 우리의 남루한 일상은 비로소 '파인(Fine)'한 품격을 얻게 된다.

📊 데이터로 읽는 혼술의 그늘

보건복지부의 2024년 고독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3년 고독사 사망자 수는 3,661명에 달하며 50대와 60대 남성이 전체의 53.9%를 차지한다. 1인 가구의 45%가 스스로 고독사할 것을 염려하는 시대다.

단순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방 안에서 혼자 마시는 술은 뇌의 보상회로를 망가뜨리고 단절을 심화시킨다. 미국 국립알코올남용중독연구소(NIAAA)는 만성적인 음주가 전두엽 뉴런을 위축시키고 기억을 단절시키는 인지 장애를 유발한다고 경고한다.

낭만으로 치장된 혼술의 뒷면에는 사회적 고립이라는 거대한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어린 왕자의 주정뱅이와 고립된 현대인의 자화상

순환 논증의 함정에 빠진 고독한 영혼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행성들 중 가장 기묘하고도 서글픈 장소는 바로 세 번째 별이다. 그곳에는 빈 병과 차 있는 병들에 둘러싸인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홀로 술을 마시는 주정뱅이가 산다. 어린 왕자가 다가가 "왜 술을 마셔요?"라고 묻자 그는 "잊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무엇을 잊기 위해서인데요?"라고 다시 묻자 주정뱅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부끄러운 것을 잊기 위해서"라고 털어놓는다. 마지막으로 왕자가 "뭐가 부끄러운데요?"라고 묻자 그는 고백한다. "술을 마시는 내가 부끄러워서 마신다!"
이 장면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가장 완벽하고도 절망적인 '순환 논증(Petitio Principii)'의 표본이다. 왜 가난하냐는 물음에 돈이 없어서라 답하고, 왜 돈이 없냐는 물음에 가난하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원인과 결과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무한히 맴돈다. 독일 철학자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가 설파한 '뮌히하우젠의 트릴레마'에 따르면 인간이 진리를 검증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세 가지 수렁 중 하나에 빠진다. 무한히 소급하거나, 순환 논증에 갇히거나, 아니면 독단적으로 특정 지점에서 사유를 강제 중단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의 주정뱅이는 단순한 동화 속 익살꾼이 아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고립된 개인들의 내면 풍경을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포착한 현상학적 표상이다. 스스로의 무기력과 고립이 부끄러워 혼자 술을 들이켜고, 술에 취해 흐트러진 자신의 꼴이 부끄러워 다시 다음 날 밤 편의점 캔맥주를 따는 이 지독한 뫼비우스의 띠.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작은 별에 갇혀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잔을 채우는 주정뱅이의 그림자를 등에 업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혼술'로의 전락

인류 문명의 역사를 통틀어 술에 대한 기록은 차고 넘치지만, '술을 혼자 마신다'는 현상이 보편화된 것은 극히 최근의 기이한 사건이다. 이백(李白)이 달 밝은 밤 꽃나무 아래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는 '월하독작(月下獨酌)'의 시구조차,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완전한 고립이 아니었다. 그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그림자를 불러내어 자신까지 셋이서 벗을 삼았으며, 바람과 구름, 자연이라는 거대한 타자와 끊임없이 교감했다.
고대 그리스의 '심포지엄(Symposion)'이나 포도주의 신을 기리는 '디오니소스 축제', 로마의 '바쿠스 축제'에서 술은 언제나 공동체의 제의(Ritual)였다. 낮 동안 이성과 법률, 계급의 갑옷을 입고 살아가던 시민들은 축제의 밤이 되면 한자리에 모여 술을 나눠 마시며 춤추고 노래했다. 그것은 개인이 스스로의 자아를 버리고 타인과 엉켜 하나가 되는 성스러운 도취의 시간이었다. 전통 사회에서 혼자 술을 숨겨두고 홀짝이는 자는 자기를 공동체에 내어놓을 줄 모르는 위험하고 결핍된 인간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 찬란했던 공동의 제의를 해체하고, 술을 파편화된 개인의 방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전통 사회 시스템이 개인에게 "금욕하라, 참아라, 견뎌라"라고 명령했다면, 소비 자본주의는 정반대로 속삭인다. "참지 마라! 즐겨라! 너만의 취향을 소비하라!" 그러나 이 달콤한 소비의 명령 뒤에는 차가운 덫이 놓여 있다. 즐기기는 하되, 타인과 부대끼며 생겨나는 갈등과 소음의 비용은 치르기 싫다는 현대인의 이기심과 두려움이 결합하면서 '혼술'이라는 기형적인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타자와의 접속을 거세당한 채 밀폐된 방 안에서 홀로 비워내는 잔은, 도취의 축제가 아니라 고립의 확인 사살일 뿐이다.

타자에 취하지 못할 때 싹트는 파괴와 혐오의 본능

사람은 본질적으로 무언가에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실존적 결핍을 안고 태어난다. 그것이 술이든, 뜨거운 사랑이든, 광적인 예술이든, 종교적 영성이든, 인간은 자아의 좁은 감옥을 부수고 바깥으로 뛰쳐나가려는 근원적인 충동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인간이 술도 마시지 않고, 타인을 열렬히 사랑하지도 않으며, 예술의 황홀경에도 빠지지 못한 채 완벽하게 맹목적인 이성의 갑옷만을 두르고 산다면 어떻게 될까?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평생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철저한 금주가로 유명하다. 그의 형 프레드 트럼프 주니어가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가족력 때문에 스스로 엄격한 금욕의 원칙을 세웠고 자녀들에게도 음주를 엄금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트럼프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충동적이고 과격한 언행을 일삼으며 세계를 뒤흔든다. 술을 마시지 않는 그는 과연 아무것에도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일까? 아니다. 그는 '타자에 대한 혐오와 지배욕'에 지독하게 취해 있는 것이다.
인간이 긍정적인 타자, 즉 사랑하는 연인이나 경이로운 자연, 혹은 곁을 지키는 반려동물에게 마음을 열고 취하지 못할 때, 그 억압된 도취의 에너지는 반드시 어둡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분출된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극우 포퓰리즘, 소수자에 대한 혐오, 세대와 젠더 간의 날 선 증오는 모두 '홀로 있음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타자와 관계 맺지 못하는' 불능 상태에서 잉태된 독버섯들이다. 내가 무언가에 아름답게 취하지 못하면, 세상 전체를 부숴버리고 싶은 파괴의 쾌락에 취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이 고발하는 현대 사회의 가장 끔찍한 비극이다.

💭 홀로 있음의 무게를 견디는 법

나 역시 지난 몇 년간 좁은 자취방에서 수없이 혼술을 마셔왔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유튜브 영상을 틀어놓은 채 들이키는 맥주 한 캔은 유일한 보상이자 휴식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술기운이 가시고 빈 캔을 분리수거함에 던져 넣을 때마다 찾아오던 그 기괴한 공허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은 안전하게 나를 지키려 하면서도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 하던 비겁한 타협의 대가였다.

완벽히 고립된 인간은 결국 자신을 갉아먹거나 세상을 향해 날 선 혐오를 뿜어내게 마련이다. 혼자 방에 있더라도 창밖의 길고양이와 눈을 맞추거나, 책 속의 철학자들과 치열하게 대화하며 내 안의 벽을 허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술잔을 비울 때조차 타자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어두지 않는다면, 그 술은 피를 맑게 하는 묘약이 아니라 영혼을 질식시키는 독약이 될 뿐이다.

미메시스와 에로티시즘, 위험한 사랑으로의 초대

이성의 신화를 넘어: 퇴행과 초월이 교차하는 지점

계몽주의 이후 서구 근대 문명은 인간의 이성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맹목적인 신앙을 바쳐왔다. 합리성과 계산 가능성, 효율성이야말로 인간을 야만에서 구원할 유일한 빛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이성의 신화' 속에서 자아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술과 도취는 언제나 통제되어야 할 위험한 광기이자 악덕으로 낙인찍혔다. 현대 자본주의가 알코올 중독을 도덕적 죄가 아니라 치료해야 할 '의학적 질병'으로 재정의한 것 역시, 시스템의 노동력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일탈된 육체를 정상 궤도로 복귀시키려는 규율 권력의 작동 방식이다.
그러나 이성을 맹신하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생명 없는 기계로 전락시킨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자아를 포기하고 유아기적 본능으로 물러서는 '퇴행'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나를 억압하던 사회적 감옥을 깨부수고 무한한 타자와 하나가 되는 '초월'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미학이나 정신분석학의 눈으로 볼 때 퇴행과 초월은 칼로 자르듯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한 몸으로 얽혀서 찾아온다.
이러한 자기 상실의 초월적 경험은 비단 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맹렬한 예술적 창작, 신비주의 종교의 영성 체험, 그리고 온몸이 녹아내리는 강렬한 에로티시즘이 모두 같은 궤도 위에 놓여 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아편이라 비판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종교를 욕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차가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홀로 버려진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기에 영적 환각에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을 꿰뚫어 본 통찰이었다. 신천지나 통일교 같은 사이비 종교 집단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청년들을 빨아들이는 근본적인 이유 역시, 이 고립된 사회 속에서 자기를 던져 소속될 공동체적 도취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정태춘의 북한강과 타자가 되는 미메시스의 경지

예술이 우리에게 깊은 전율을 선사하는 순간은 대상과 주체가 날카롭게 대립할 때가 아니다. 화가나 시인이 자연을 분석적 시선으로 대상화하여 붓을 놀리거나 펜을 굴릴 때, 거기서는 결코 영혼을 흔드는 걸작이 탄생하지 않는다. 아도르노와 벤야민이 강조했던 '미메시스(Mimesis)', 즉 신체적이고 유기체적으로 내가 타자가 되고 타자가 내가 되는 온전한 동화의 순간이 있어야만 진정한 예술이 발화한다.
가객 정태춘 선생이 물안개 피어오르는 새벽 북한강가에 서서 노래를 지을 때를 떠올려 보라. 강물을 객관적인 풍경으로 바라보며 "이 수면의 파동을 이렇게 수사학적으로 묘사해야지"라고 잔머리를 굴렸다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 불후의 명곡 「북한강에서」는 결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온몸으로 차가운 강물이 되고, 굽이치는 북한강이 정태춘이라는 인간의 육신을 빌려 흘러넘칠 때 비로소 시와 음악이 터져 나온 것이다.
미메시스는 곧 가장 숭고한 형태의 에로티시즘이다. 에로티시즘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성애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가 갈파했듯, 불연속적인 개체로 태어나 고립된 채 살아가는 인간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긍정하며"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연속성의 세계로 뛰어드는 치명적인 융합의 체험이다. 내가 사라지고 너와 나의 구분이 지워지는 이 경이로운 접속이야말로, 예술과 술,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지향해야 할 궁극의 목적지다.

자크 라캉의 사랑과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사랑에 대해 무릎을 치게 만드는 정의를 남겼다. "사랑이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그것을 전혀 원하지 않는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다." 얼마나 얄궂고도 찬란한 역설인가. 내가 가진 잉여의 재물이나 알량한 능력을 베푸는 것은 거래나 자선이지 결코 사랑이 아니다. 내 안의 결핍과 빈틈을 온전히 드러내고, 상대방이 미처 바라지 않았던 내 취약한 심장 전체를 덜컥 건네는 행위야말로 사랑의 시작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마치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며 각성의 위험을 피하고, 무알코올 맥주를 홀짝이며 숙취의 고통을 피하듯,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안전하게 발을 담그는 비겁한 연애를 반복한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비판처럼, 내가 산산조각 파괴될 각오도 없고 죽음에 이를 만큼 몰입할 힘도 없으면서 안전한 쾌락만을 소비하려 든다. 혼자 술을 마시는 현대인의 태도 역시 정확히 이 지점에 닿아 있다. 타인과 부딪혀 상처받는 위험은 감수하기 싫고, 그렇다고 고독의 지옥을 견딜 힘은 없으니,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알코올로 뇌세포만 안전하게 마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죽여본 적이 없는 안전한 삶에서는 어떤 깊이도, 예술적 통찰도 피어나지 않는다. 명작이라 불리는 모든 문학과 예술은 창작자가 겪어낸 겹겹의 죽음과 실존적 파멸의 잿더미 위에서 피어난 꽃들이다. 사랑도, 예술도, 그리고 우리가 마시는 한 잔의 술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 비겁하고 안전한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망가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의 심연 속으로 온몸을 던질 때, 비로소 우리는 고독의 저주에서 벗어나 살아 숨 쉬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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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혼자 골방에 숨어 차가운 술잔을 기울이지 말자. 그것은 나를 지키는 휴식이 아니라, 타자와의 연결을 거부한 채 스스로를 서서히 말려 죽이는 잔인한 유예일 뿐이다.

술은 본래 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자아의 오만한 에고를 내려놓고 타인과 어깨를 걸기 위해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었다. 잔을 채울 때는 그 술이 머나먼 대지에서 효모의 숨결을 거쳐 내 손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떠올리고, 마주 앉은 이의 눈동자 속에 숨겨진 고독과 슬픔을 응시하자.

설령 오늘 밤 마주 앉을 연인이나 벗이 곁에 없다면, 발밑을 맴도는 고양이의 신비로운 눈빛에라도 마음을 뺏겨야 한다. 밤하늘의 서늘한 별빛이나 책장 속 철학자들의 치열한 문장에라도 나를 온전히 내맡겨야 한다.

오늘 밤, 당신의 술잔은 누구를 향해 열려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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