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매일같이 쏟아지는 업무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늘 지쳐 있다.
퇴근 길에 맥주 한 잔을 기울이거나 주말에 늦잠을 자는 것으로 겨우 버텨보지만, 묘하게도 피로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라도 가겠지만, 마음이 멍들고 외로움이 찾아올 때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스트레스 받지 마"라는 뻔한 위로 따위는 이제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무책임한 조언을 들을 때마다 속만 더 답답해질 뿐이다. 😅
김경일 교수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스트레스와 외로움을 얼마나 무식하고 무모한 방식으로 다뤄왔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단순히 마음을 곱게 먹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외로움과 스트레스는 우리의 뇌와 신체가 보내는 지극히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경고 신호다. 이 경고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나쁜 관계로 도피하거나 스스로를 갉아먹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외롭게 만들고, 어떻게 해야 진짜로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는 것인지 차근차근 짚어봐야 할 때다.

한국과 일본의 심리적 대척점: 스트레스와 외로움의 사회적 얼굴
한국의 스트레스 중심 사회와 일본의 외로움 중심 사회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스트레스성 사회'로 정의할 수 있고, 일본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회'로 볼 수 있다. 두 나라 모두 치열한 현대 사회를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 심리적 어려움의 뿌리는 완전히 다르다.
이런 차이는 두 국가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유전자에 깊게 박혀 있다. 일본은 만년 동안 누구도 침범하지 않은 섬나라라는 특성상 내부의 질서와 엄격한 규칙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선을 넘지 않는 것, 그리고 남의 일에 절대 참견하지 않는 태도가 그들의 문화적 본질로 자리 잡았다.
반면 한국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내부에 가만히 앉아 정해진 규율만 따지고 있었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 결과 역동적이고 순간적인 적응력이 생존의 무기가 되었고, 우리는 스스로를 '참견의 민족'이라 부를 만큼 선을 넘나드는 관계 속에서 살아왔다. 남의 일에 끼어들고, 정을 나누고, 때로는 그 과도한 오지랖 때문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회가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인이 외로움을 모르고 일본인이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아픔의 농도와 주된 결이 다를 뿐이다.
우리가 매일 겪는 이 참견과 간섭의 문화는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옆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가 내 삶의 기준이 되고, 내 속도대로 살아가기보다 남의 시선에 맞추어 뛰어야 하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수밖에 없다.
일본식의 고립된 외로움과는 또 다른 형태의 정신적 질식 상태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한국 사회가 유독 화가 많고 늘 긴장 상태에 있는지 그 실마리를 찾게 된다.
마음 편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첫 번째 병든 단면이다.
기대수명 증가 이면에 숨겨진 외로움의 공포
최근 대부분의 수명 지표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는 반가운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장수 국가 하면 일본을 떠올리던 우리에게는 꽤나 놀라운 결과다.
양국의 의학 및 과학 기술력에는 큰 차이가 없는데도 한국의 수명 증가세가 이토록 가파른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하지만 수치가 늘어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의 질까지 함께 좋아지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하나같이 "스트레스보다 무서운 게 외로움이다"라고 경고한다.
스트레스는 그나마 대처 방안을 찾고 주변의 사회적 지원을 받으면 어느 정도 관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외로움은 일단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고 관리하기도 지독하게 어렵다.
실제로 외로운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겪는 사람들보다 더 일찍 사망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관찰되며, 이는 역학적으로도 엄연한 인과관계가 증명되어 있다. 영국의 경우 이미 지난 2018년에 '외로움 전담 장관직'을 신설하며 국가적 차원의 대응에 나섰다.
주변에 사람이 많을 때는 관계를 줄여가며 숨을 고를 수 있지만, 이미 사람이 다 떠나버린 고립된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인의 21%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으며, 이는 WHO가 제시한 세계 평균을 훌쩍 웃도는 수치다. 특히 놀라운 점은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외로움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60대 이상 고령층에서는 위기 상황에서 경제적·정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 고독사 문제에만 매달려 예산과 제도를 쏟아부을 것이 아니라, 그 이전 단계인 사회적 연결망의 붕괴를 막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되려면, 곁에 온기를 나눌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자꾸만 잊고 산다.
🔥 외로움을 단순한 개인의 성격 탓으로 돌리는 폭력
외로움을 느끼는 것을 나약한 개인의 탓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시선은 그야말로 폭력이다. 늙어갈수록, 혹은 가난할수록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되는 구조적 모순을 방치한 채 혼자 외롭게 지낸다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가짜 공정이다.
외로움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적 단절이 낳은 공중보건의 위기다.
중년의 대인관계와 사회성: 기름 탱크의 용량을 아는 법
내향인에 대한 오해와 사회적 에너지의 한계
외로움을 해결하겠다고 무작정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한 김경일 교수의 답은 명확하다.
"주량을 넘겨서 마시면 술의 모든 의미가 없어지듯,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적정량이 있다." 우리는 흔히 사회성이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사회성은 '기름 탱크의 용량' 정도로 생각해야 타당하다. 사람마다 그 탱크의 크기가 다르고,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특히 내향적인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에 비해 사람을 싫어하고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는 편견이 퍼져 있는데, 이는 대단한 오해다. 내향인은 단지 즐겁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외향적인 사람에 비해 적을 뿐이다. 그들의 기름 탱크가 작거나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을 뿐인데, 마치 사회성이 부족한 결격사유가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부당하다.
젊은 시절에는 조금 서툴러도, 혹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받아도 어느 정도 용서받고 넘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사회라는 거대한 울타리가 젊음이라는 면죄부를 어느 정도 발급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숙함이 엄격하게 요구되는 중년의 시기로 접어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중년이 될수록 자신의 사회적 에너지 용량을 정확히 파악하고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만약 이때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억지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거나, 피곤하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불친절하고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인다면 타인에게 용납받기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품격이란 내 안의 에너지를 어디에 쏟고 아낄지 아는 능력에서 나온다.
억지로 사람을 늘리려다 스스로를 소진시키지 않는 것, 그것이 중년 이후 관계를 지키는 첫 번째 법칙이다.
깊고 좁은 관계의 함정과 느슨한 연대의 힘
인생에 진짜 친구 몇 명만 있으면 외로움은 다 해결된다는 식의 단순한 믿음은 무척 위험하다. 만약 세상에 믿을 사람이 그 몇 명밖에 없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잃거나 멀어질 때 인생은 걷잡을 수 없는 고통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단 한 사람만 잃어도 인생이 고통 속으로 끊임없는 배신감이나 상실감으로 빠질 수 있다." 가깝고 깊은 관계에만 모든 것을 올인하는 삶은 생각보다 위태롭다.
배우자나 절친에게만 정서적 의존을 전부 몰아두었다가 그 관계가 흔들릴 때 사람들이 무너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가깝고 깊은 관계 못지않게 느슨하고 다양한 관계에 대해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매일 아침 단골 카페에서 인사를 나누는 바리스타, 동네 산책길에 마주치는 이웃, 가끔 안부를 묻는 가벼운 모임의 사람들처럼 이름만 간신히 아는 느슨한 인연들이 우리의 정신 건강을 지탱하는 진짜 방패가 되어준다.
깊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부담이 없고, 실망할 일도 적으며, 삶의 구멍을 메워주는 실손보험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진짜 친구'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을 타인에게 지워왔다.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내 모든 아픔을 받아줄 단 한 사람을 찾아헤매지만, 그런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서로를 갉아먹기 쉽상이다.
다양한 곳에 가볍고 느슨한 줄을 여러 개 걸쳐두는 것, 그것이 폭풍우가 몰아칠 때 내 삶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지혜다. 외로움은 깊은 외딴섬에 홀로 갇힐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모든 가벼운 연결을 스스로 끊어버릴 때 비로소 완성된다.
📊 전 세계 외로움 실태와 한국의 현주소
세계보건기구(WHO)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15.8%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으며, 한국은 그보다 높은 21%에 달한다. 특히 청소년과 고령층의 사회적 고립은 매년 87만 명의 사망을 유발하는 공중보건의 위기다.
외로움과 고독의 갈림길: 남의 감탄에 목매는 삶에서 벗어나기
생각이 멈춘 상태인 외로움과 스스로를 채우는 고독
혼자 있는 시간이 괴로워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워라"라는 조언을 건네곤 한다. 하지만 철학적 고민의 깊이를 들여다보면 외로움과 고독은 결코 같은 뜻이 아니다. 고독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에 깊은 생각을 진행시키며 내면을 단단하게 다지는 상태다.
반면에 외로움은 내가 나 혼자 세상에 버려져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뇌의 회로가 꽉 막혀버려 생각이 즉시 멈춰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고통스러운 외로움은 병으로 보지만, 고독은 적극적으로 즐긴다는 표현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독을 즐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그것은 내가 혼자 있을 때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더 나아가 어떻게 의미 있게 쓸지를 스스로 아는 능력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어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독서를 하거나 취미를 즐기고, 새로운 문화나 레저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왜 우리가 취미 생활에 돈과 시간을 써야 하냐"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혼자 있는 고요함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엉뚱한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을 의미 있게 채우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문화심리학자 김정원 박사의 말처럼, 외로움에 견디다 못해 최악의 나쁜 관계로 도피하는 치명적인 악순환이 벌어진다. 외로움을 없애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무 남자나, 혹은 아무 사람이나 곁에 두고 의존하다가 호되게 이용당하고 상처를 입는다.
사람에게 깊게 실망한 끝에 다시 마음을 닫고 아무 관계 없는 극심한 외로움 속으로 스스로를 유배 보내는 것이다. 이 지옥 같은 반복 고리를 끊어내려면 혼자서도 내면을 단단하게 가꾸는 '고독의 기술'을 반드시 연마해야만 한다.
인정 투쟁의 함정: 남의 감탄에 목매는 삶을 멈추는 법
온갖 취미생활을 다 해보고 남들이 좋다는 건 다 따라 해보는데도 여전히 외로워서 못 견디겠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진 깊은 심리적 본능, 즉 인정 투쟁적 삶에서 찾을 수 있다. 청년 헤겔의 철학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만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슬픈 진실을 담고 있다.
타인이 나를 바라봐 주고 감탄해 주어야만 내 존재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타인의 따뜻한 인정과 칭찬은 삶의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내 존재의 이유와 주체성이 오로지 타인의 시선과 박수갈채에만 의존해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불안을 낳는다.
남들의 시선에 목매는 사회, 다른 사람이 감탄할 만한 화려한 스펙과 취미를 SNS에 전시하는 데만 목숨을 거는 삶은 결국 끝없는 허기로 이어진다. 취미나 여가 활동을 열심히 한다는 것 자체가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취미를 즐기는 과정조차 오로지 남들을 감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진정으로 나 자신에게 감탄하게 될까. 그 해답은 바로 성장에 있다.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경쟁적인 취미나 스펙 쌓기가 아니라, 어제는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되고 내면의 지식과 감수성이 한뼘 더 자라나는 것을 체감할 때 비로소 외로움은 발을 붙이지 못한다.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닳아버린 영혼을 채우는 것은 남들의 찬사가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 더 깊어진 나 자신과의 대화다.
남의 감탄을 구걸하는 삶에서 내려와 내가 나에게 감탄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외로움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유일한 길이다.
💭 에디터의 단상: 타인의 박수라는 거대한 신기루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내가 누구인지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살아왔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번듯한 취미까지 모든 것이 타인의 감탄을 자아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낸 박수갈채는 밤이 깊어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타인의 인정이라는 거대한 신기루를 좇느라 지쳐버린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의 작은 성취뿐이다.
남들이 보지 않아도 내가 나에게 칭찬해 줄 수 있는 순간, 비로소 외로움이라는 거대한 그림자는 힘을 잃는다.
스트레스의 본질과 뇌의 생리적 착각: 망치로 맞은 뇌를 돌보는 법
통제권의 상실이 부르는 스트레스와 황당한 상상
우리는 삶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스트레스 받지 마"라는 영혼 없는 소리를 귀에지가 앉도록 듣는다. 하지만 그 말은 참 답답하고 막막하며 죄송한 느낌까지 준다.
스스로에게 '스트레스 받지 말자'고 다짐해 봐도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스트레스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여러 가지지만, 그 본질을 파악하려면 "내가 통제권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감정 그 자체보다 '통제권이 없다'라는 사실이 우리를 미치게 만든다.
똑같이 힘든 일을 겪어도 나에게 통제권이 있으면 스트레스를 적게 받지만,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라면 사소한 압박에도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직장 상사가 다그치며 인간적인 모멸감을 줄 때 우리가 무너지는 이유는 그 상황을 내가 바꿀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주 황당하지만 시원한 상상을 하나 해보자. 책상 위에 미운 상사의 이름을 적은 인형을 하나 올려두고 앞정으로 콕 찌를 때마다 그 상사가 실시간으로 아파한다고 가정해 보자.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이처럼 상황의 주도권을 내가 완전히 쥐고 있다는 감각을 가질 수만 있다면 스트레스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물론 그렇다고 회사원에게 "당장 통제권을 가져라!"라고 소리치는 것은 앞서 말한 "스트레스 받지 마"와 다를 바 없다. 중요한 것은 암시적으로 통제권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는 물리적·심리적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풀겠다고 직장을 다니는 중에 갑자기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대책 없는 행동은 오히려 표지판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든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변화, 통제권, 그리고 아주 작고 구체적인 일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반드시 맞아떨어져야 한다.
나만의 소소한 방식을 찾아내는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한 이유다.
뇌가 인식하는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의 일치
우리 인간의 뇌는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정직하다. 뇌는 물리적인 상해로 인해 피 흘리고 뼈가 부러졌을 때 느끼는 신체적 고통과, 직장이나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았을 때 느끼는 사회적 고통을 별로 다르게 구분하지 않는다.
뇌 속의 전측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이라는 영역은 부모에게 꾸중을 듣거나 친구에게 왕따를 당할 때나, 길에서 넘어져 살점이 찢어졌을 때나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활성화된다.
심지어 어떤 뇌 과학자들은 우리의 뇌가 뼈가 부러지는 고통과 사람 때문에 겪는 괴로움을 하드웨어적으로 거의 똑같이 처리한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뼈가 부러지거나 몸을 크게 다쳤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잘 먹고, 잘 자고, 혈액순환이 잘 되도록 몸을 따뜻하게 지지며 회복에만 전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스트레스라는 엄청난 사회적 폭행을 당했을 때는 이를 그저 정신력의 문제로만 치부하며 억지로 이겨내려고 악을 쓴다. 이것은 우리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모르는 무식한 처사다. 김경일 교수가 농담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어제 괴한한테 망치로 세 대 맞았어"라거나 "덤프트럭에 치였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뇌가 실제로 그만큼의 충격을 받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잡한 철학적 사색이 아니다. 몸을 심하게 다친 사람처럼 양질의 음식을 먹고, 깊은 잠을 자며, 신체를 물리적으로 돌보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술로만 풀려고 하거나 억지로 긍정적인 사고를 주입하려는 태도는, 다리 부러진 사람에게 일어나서 빨리 뛰라고 다그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 뇌가 지금 어디쯤 다쳐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물리적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스트레스 관리의 진짜 핵심이다.
🔥 정신력 타령을 멈추고 뇌의 비명을 들으라
스트레스를 의지박약이나 멘탈의 문제로 몰아가는 꼰대식 사고방식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퇴출되어야 한다. 뇌는 신체적 부상과 심리적 상처를 똑같이 아파하는데, 정신력으로 버티라는 것은 상처 부위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마음의 상처는 의지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돌봄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술과 스트레스의 착각: 직장 밖의 느슨한 연대와 진짜 해소법
진정제인 술의 두 얼굴과 직장 동료와의 술자리가 위험한 이유
스트레스가 쌓일 때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것은 단연 술이다. 하지만 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술은 기본적으로 우리 몸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진정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진정제인 술을 마시고 오히려 목소리가 커지고 흥분하게 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술의 두 가지 국면이 숨겨져 있다. 첫 번째 국면에서 술은 우리를 차분하게 만드는 뇌의 억제 기제들을 먼저 마비시킨다.
즉, 평소에 이성으로 꾹꾹 눌러 담던 억제력을 낮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몸을 쓰러뜨릴 정도로 강력한 일반적인 진정 효과가 찾아온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왜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직장 동료들과 술자리를 가지는 것이 최악의 선택인지 명확해진다. 제어 장치가 풀려버린 상태에서 회사 사람들과 마주 앉아 상사 욕을 하고 회사를 씹어대면, 평소라면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을 격한 감정들이 여과 없이 튀어나오게 된다.
필요 이상의 원망, 섭섭함,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고 나면 그 순간에는 시원할지 몰라도, 다음 날 정신을 차렸을 때 밀려오는 2차적 스트레스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직장의 스트레스를 직장 사람들과 술로 풀려다가는 더 깊은 진흙탕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반드시 내 직장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김경일 교수가 대학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수원시 인계동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친구 '김창석' 씨를 찾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수가 "총장님이 나한테 너무 섭섭하게 했다"고 하소연해도 그 카센터 친구는 "총장이 뭐야?"라며 전혀 감흥 없이 무심하게 되묻는다. 그 덤덤한 반응 속에서 교수는 자신의 억울했던 감정을 차분히 설명하게 되고, 어느새 화가 누그러지며 스트레스가 마법처럼 조절되는 것이다.
내 일상을 공유하지 않는 타인과의 만남, 그것이 진짜 스트레스 해독제다.
착한 사람을 향한 화풀이와 짧은 시간에 뇌를 속이는 기술
스트레스를 풀 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가장 나쁜 습관이 있다. 바로 내 주변에서 가장 만만하고 착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행위다.
우리는 흔히 화를 내지 않고 늘 다 받아주는 선하고 영리한 사람을 '바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들이 묵묵히 참아주니까 내가 만만하게 대해도 된다고 오답을 내놓는 것인데, 이는 본인의 지능이 낮음을 인증하는 꼴이다.
만만한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쏟아부으면 당장은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결국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좋은 사람부터 내 곁을 하나둘씩 떠나게 된다.
주변에 이상하게 나쁜 사람들만 바글바글하다면, 그건 다른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그동안 내가 착한 사람들을 골라가며 가혹하게 화풀이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100%다. 소시오패스 주변에 더 악랄한 소시오패스들만 남는 이유도 선한 사람들이 그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전부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내 곁의 좋은 사람을 지키고 싶다면, 스트레스라는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하찮은 버릇부터 당장 고쳐야 한다. 스트레스는 큰돈을 쓰거나 거창한 여행을 떠나야만 풀 수 있는 거대한 산물이 아니다.
시간이 없을 때 화장실 갈 시간 정도만 있어도 뇌는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다.
김경일 교수가 실천하는 시간대별 해소법은 우리에게 훌륭한 팁을 준다. 30분의 여유가 있다면 영혼을 맑게 해주는 칼국수를 한 그릇 먹고, 5분의 여유가 있다면 뭉친 신체를 주무르는 마사지를 하며, 단 1분의 시간밖에 없다면 깊은 심호흡을 5번에서 10번 정도 반복하는 것이다.
이 짧은 순간의 성의만 보여줘도 우리의 뇌는 "야, 너 그래도 나를 신경 써주는구나! 나도 최선을 다해서 버텨볼게"라며 즉각 협력적인 태도로 돌아선다.
거창한 대책을 세우려 애쓰지 말고, 지금 당장 숨을 깊게 들이쉬며 나만의 작은 데이터베이스를 쌓아가는 것, 그것이 이 각박한 세상에서 내 마음을 지키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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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스트레스는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찾아오는 불청객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달라는 내 몸의 가장 정직한 목소리다. 타인의 감탄에 목매는 허망한 투쟁을 멈추고, 내 안의 작은 성장에 집중하며, 느슨한 연대 속에서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삶.
그것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가 기꺼이 찾아야 할 진짜 생존의 기술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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