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찬바람이 불고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이 왔다. 회사에서는 벌써 사업계획서를 내야 할 시즌이 다가오고 연말 인사 이동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는 요즘, 어김없이 서점가와 유튜브 피드를 뜨겁게 달래는 책이 있다.
바로 매년 가을 이맘때쯤 우리 사회의 방향을 짚어주는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2027》 출간 소식이다. 9월 30일 책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다가올 내년의 풍경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올해 발표된 10대 키워드를 살펴보면 예년과 사뭇 다른 기묘한 지점이 눈에 띈다. 작년까지만 해도 'AX 조직'이니 '휴먼 인 더 루프'니 하며 전면에 당당히 내걸리던 AI라는 단어가 10대 키워드 표면에서 싹 사라진 것이다.
'왜 AI가 중요하다면서 관련 키워드가 없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피로감과 과잉의 그늘
바쁜데 왜 우린 이렇게 심심할까, 권태사회의 진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인상말로 "잘 지내?" 대신 "요새 뭐 재밌는 일 없어?"라고 묻는 일이 허다하다.
그렇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본인도 삶에 지독하게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 아닐까. 스마트폰만 들면 눈을 사로잡는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가 쏟아지고,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는데 대한민국은 지금 사상 유례없는 심심함과 무기력에 빠져 있다.
과거의 권태가 할 일이 없어 "이 지루한 시간이 언제 끝나나" 하던 결핍의 권태였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권태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 너무 할 일이 많고 너무 많은 자극에 시달리면서 오히려 뇌가 마비되는 과잉의 권태, 바쁜 권태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면 '얼태기', '옷태기', '책태기', '십태기', '밥태기'처럼 삶의 모든 국면에서 권태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현대인의 마음 건강을 추적해 온 여러 연구 결과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은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특히 성인 인구의 우울감 경험률이 11%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이제 번아웃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풍경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끊임없는 알림과 도파민 자극에 절여진 뇌는 정작 깊은 만족감을 얻지 못하고 더 큰 자극만을 갈구하다가 결국 차가운 공허함에 부딪히고 만다.
조직에서도 이 문제는 심각하다. AI가 도입되면서 일의 효율은 높아졌다고 하지만, 소수에게 업무가 편중되면서 직장인들의 몰입도는 오히려 바닥을 치고 있다.
구글이 업무 시간의 20%를 전혀 새로운 일에 쓰도록 하는 제도를 두거나 직무를 스스로 재정의하는 '잡 크래프팅'을 만지작거리는 이유도 결국 이 지독한 조직 내 권태를 어떻게든 깨부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 과잉의 권태 속에서 개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김난도 교수는 역설적이게도 '심심함의 미학'을 되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손에 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의도적으로 멍하니 차분한 시간을 가질 때, 비로소 뇌는 숨을 쉬고 새로운 창의적 생각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권태사회가 우리에게 건네는 처방은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용기 있게 조금 더 권태로워지는 것, 즉 멈춤의 미학을 복원하는 데 있다.
🔥 자극이 넘칠수록 영혼이 메말라가는 아이러니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정보와 가장 빠른 기술 속에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무기력한 세대를 지나고 있다. 자극의 과잉은 생각을 마비시키고, 바쁘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을 지워버렸다.
권태는 단순히 심심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방향성을 잃었다는 가장 정직한 경고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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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의 순간에 손익계산서를 두드리는 라이프 ROI
삶의 피로감이 극에 달하면서 사람들의 의사결정 방식도 냉혹하게 변하고 있다. 투자 시장에서 투자비용 대비 수익률을 따지던 ROI(Return on Investment)의 논리가 이제는 우리의 일상과 인간관계, 결혼, 교육까지 무자비하게 파고들고 있다.
대학 수업에서 "남은 수업 두 번은 안 들어도 학점 나오는 거죠?"라고 묻는 학생들의 태도는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다. 투입한 시간과 노력 대비 확실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가감 없이 손절하겠다는 계산이 삶의 표준이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 제도 속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최근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 결혼식을 올리고도 혼인신고를 의도적으로 미루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주택청약에서 가장 유리한 가점을 받을 수 있는 시점, 혹은 아기를 낳은 뒤 미혼모 지원 등의 혜택을 극대화할 수 있는 타이밍을 저울질하며 서류상의 결합을 미루는 것이다. 심지어 학교 현장에서는 방학을 앞두고 임시로 복직했다가 방학이 되면 다시 휴가를 내는 방식의 꼼수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물론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실리를 챙기는 것이 개인의 합리적 선택일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공동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신뢰와 공공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이 현상을 단순한 이기주의로 치부하기에는 우리 삶을 조여오는 경제적 압박이 너무나 거세다. 가처분 소득은 줄어들고 미래는 불확실한 바이브세션의 시대에, 사람들은 감정에 호소하는 희생이나 낭만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한다.
내가 쏟아붓는 에너지와 돈이 정확히 어떤 가치로 환산되는지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 그것이 바로 라이프 ROI가 지배하는 2027년의 자화상이다.
결국 이 차가운 계산법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을 수치화하고 효율로만 재단할 때, 과연 그 끝에 남는 것은 알찬 인생의 성과일까 아니면 앙상하게 마라버린 관계의 파편일까.
효율을 따지는 것은 자유지만, 효율의 눈으로만 세상을 볼 때 놓치게 되는 삶의 온도를 우리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구조를 비틀고 일단 저지르는 생태계의 대전환
물성과 구조, 행동을 바꾸는 폼펙터 시프트의 마법
경제가 얼어붙고 상품 간의 기술 격차가 좁혀져 더 이상 기능만으로는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이 치열한 정체기를 돌파하기 위해 기업들이 꺼내 든 강력한 무기가 바로 폼펙터 시프트(Form Factor Shift)다.
상품의 본질적인 기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물성, 구조, 동작, 형태 등 껍데기를 살짝 비틀어주는 것만으로도 소비자에게 신선한 충격과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전략이다. "간단한 생각의 전환이 사람의 생각을 바꾼다"는 철학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일상을 살펴보면 이 폼펙터 시프트는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다. 늘 액체 형태로 들고 다니며 기내 반입을 걱정하게 만들었던 샴푸는 물성을 바꿔 타일 형태의 고체 샴푸로 진화했고, 치약 역시 알약처럼 씹어서 양치할 수 있는 형태로 변모했다.
요리할 때 오랜 시간 육수를 우려내야 하는 번거로움을 단번에 해결해 준 코인 육수나, 다이소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고체 젤 타입의 향수 역시 완벽한 물성의 변화가 만들어낸 히트작이다. 구조의 변화도 놀랍다.
옛날 상소문처럼 슥 늘어나는 롤러블 형태의 IT 기기들이 선을 보이고 있고, 로봇청소기는 단순히 바닥을 닦는 것을 넘어 공기청정기를 얹거나 반려견을 찾아내는 카메라를 장착하며 모빌리티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기아자동차가 선보인 PBV(Purpose-Built Vehicle) 역시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승차용과 화물용으로 구조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대표적인 혁신이다.
소비자의 행동 패턴을 미세하게 교정하는 폼펙터 시프트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마요네즈나 케첩을 통째로 거꾸로 세워 보관할 수 있게 만든 디자인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던 인류의 오랜 스트레스를 단번에 해소해 주었다.
바퀴를 달아 집안 어디로든 끌고 다니며 시청 형태를 통째로 바꾼 이동형 TV 스탠바이미 역시 형태가 행동을 바꾼 명백한 증거다. 이처럼 혁신은 첨단 기술의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만지는 물건의 사소한 생김새를 뒤집는 데서 시작된다는 점을 폼펙터 시프트는 증명하고 있다.
결국 기업과 개인 모두에게 던져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내가 다루는 상품과 서비스의 폼펙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 자만이 저성장의 늪에서 새로운 수요의 파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
형태의 변화는 곧 생각의 변화이며, 그것이 불황을 뚫는 가장 현실적인 돌파구다.
💡 폼펙터 시프트가 던지는 핵심 시사점
- 기술의 혁신만큼이나 제품의 물성과 구조를 비트는 형태의 혁신이 중요하다.
- 고체 샴푸, 코인 육수처럼 일상의 불편함을 물성 변화로 해결한 제품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 거꾸로 세우는 용기나 이동형 TV처럼 소비자의 행동 패턴을 바꾸는 디자인이 곧 강력한 경쟁력이다.
완벽을 버리고 일단 부딪히는 해봄경제와 저장인류의 명암
실행 비용이 획기적으로 낮아진 시대, 2027년의 경제 판도를 바꿀 또 하나의 거대한 흐름은 바로 해봄경제(Have-a-Go Economy)다. 페이스북 본사에 적힌 "Done is better than perfect(완벽한 것보다 일단 끝내는 것이 낫다)"라는 격언은 이제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의 생존 법칙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수많은 인력과 자본을 동원해야만 가능했던 일들이 AI라는 강력한 지렛대를 만나면서 개인이 혼자서도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실제로 평생 동화 작가를 꿈꾸던 전직 KBS 작가는 성우, 효과음 기술자, 편집자를 고용하는 대신 AI를 활용해 목소리, 썸네일 이미지, 음악 제작부터 플랫폼 판촉까지 혼자서 완벽하게 오디오 동화를 완성해냈다.
법률 전문가의 도움 없이 AI의 도움을 받아 홀로 민사소송에서 승소했다는 주부의 소식이나, 한여름 무더위에 그늘로만 골라 걸을 수 있게 해주는 앱 '그늘로'를 만들어 유퀴즈까지 출연한 대학생의 일화는 해봄경제의 폭발력을 보여준다.
완벽한 사업계획서를 쓰느라 몇 달을 허비하기보다, 일단 시장에 내놓고 피드백을 받으며 고쳐나가는 자가 승리하는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모든 것을 기록하고 남기려는 저장인류(Homo Archivarius)의 물결도 거세다. 필름카메라 시절 36장짜리 필름을 아끼며 셔터를 누를지 말지 고민하던 시대는 옛말이 되었다.
저장 비용이 사실상 제로에 수렴하는 스마트폰 시대에 우리는 일단 사진을 찍고, 일단 통화를 녹화하며, 운동 코스와 일상의 모든 순간을 클라우드에 차곡차곡 쓸어 담는다. 기업 역시 과거의 히스토리와 레거시를 맥락 있게 아카이빙하여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헤리티지 마케팅이 필수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빛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따르는 법이다. 조깅 앱 '스트라바'를 이용하던 항공모함 승무원들이 무심코 자신의 운동 경로를 저장하고 공유했다가 항모의 군사적 기밀 위치가 그대로 노출된 사건은 저장인류의 섬뜩한 이면을 보여준다.
연말부터 본격적으로 상용화될 스마트 글래스 역시 언제 어디서나 남의 일상을 녹화하고 기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거대한 프라이버시 침해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무엇이든 저장할 수 있는 자유가 커질수록, 우리의 프라이버시는 그만큼 벌거벗겨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AI 시대 조직의 진화와 인간 고유의 엣지
AI가 공기가 된 시대, 조직의 생산성을 깨우는 바이브 워킹
기업 현장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AI 전환, 즉 AX를 부르짖으며 수많은 자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경영진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AI를 이렇게 많이 쓰는데 왜 우리 회사의 생산성과 업무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지지 않는 거지?" 경제학자 에릭 브린욜프슨 교수가 지적했듯,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 생산성은 곧바로 우상향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거의 오르지 않다가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꺾여 올라가는 J커브 현상을 그리는데, 현재 대다수의 기업은 여전히 정체된 2단계의 늪에 빠져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AI의 활용이 이메일 작성, 회의록 요약, 파워포인트 초안 작성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업무 역량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부장님께 결재를 올리는 의사결정 프로세스는 10년 전과 단 한 줄도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AI의 환각 현상을 검수하고 인간의 흔적을 덧입히느라 퇴근 시간만 더 늦어지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진정한 생산성 혁신을 원한다면 단순히 챗GPT 창을 몇 개 더 띄워놓는 것으로는 모자란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바이브 워킹(Vibe Walking)의 방법론으로 체질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
바이브 워킹의 핵심은 3단계로 나뉜다. 첫째, 기업이 가진 고유한 내부 데이터와 직무 매뉴얼을 AI가 정확히 읽어낼 수 있도록 과업의 구조를 AI 친화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둘째, 단순한 질문용 챗봇을 넘어 실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AI 에이전트'들을 직무 프로세스에 연결하여 여러 에이전트가 협업하도록 판을 깔아줘야 한다. 셋째, 인간은 그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지휘자가 모든 악기를 다 켤 줄 몰라도 전체적인 화음과 박자를 조율하듯, 인간은 AI 에이전트들의 협업을 조율하는 고유의 오케스트레이터로 거듭나야만 비로소 J커브의 폭발적 상승 구간에 진입할 수 있다.
📊 생산성 J커브와 조직의 진짜 과제
기술 도입 초기 생산성이 정체되는 이유는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프로세스의 낡음 때문이다. 개인의 보고서 작성 속도가 빨라진다고 해서 조직의 의사결정 리드타임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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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고객을 버리고 단골을 품는 리:텐션 전략과 하프시그널
저성장 터널을 지나는 시장에서 기업들의 마케팅 공식도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과거에는 쌈돈을 들여 타사의 새로운 고객을 빼아오는 데 전력투구했다.
유통 플랫폼에서 신규 고객 한 명을 유치하기 위해 지불하는 마케팅 비용은 1인당 1만 5천 원에서 2만 원에 달할 정도로 거대하다. 하지만 그렇게 악착같이 데려온 신규 고객들은 달콤한 첫구매 쿠폰만 쏙 빼먹고 곧바로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는 체리 피킹 성향이 강하다.
상표 충성도가 바닥을 치는 시대에 무한 신규 유치 경쟁은 하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다.
그래서 등장한 구원투수가 바로 리:텐션(Re:tention) 전략이다. 고객의 이탈을 억지로 틀어막는 구시대적 '락인(Lock-in)' 전략과 달리, 고객이 자발적으로 머물고 싶게 만드는 전사적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쿠팡의 새벽 배송처럼 한 번 맛보면 이전의 느린 배송 환경으로 도저히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역체감 리텐션', 그리고 리츠칼튼 호텔이 아이가 두고 간 인형을 수영장과 식당에서 즐겁게 노는 것처럼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며 부모를 안심시켰던 '환대 리텐션'이 그 모범 답안이다.
고객과의 과거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 딱 맞는 서비스를 대령하는 챗GPT의 맞춤형 기억법 역시 훌륭한 리텐션의 사례다. 이제 기업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홀려오느냐가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을 얼마나 깊이 감동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한편, 인구구조의 거대한 지각변동 속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흐름이 바로 하프시그널이다. 100세 시대를 맞아 인생의 절반에 다다른 X세대가 본격적으로 갱년기에 진입하고 있다.
과거의 갱년기는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며 남몰래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이벤트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는 수명이 늘어나면서 당당히 인생의 하프타임에 마주하는 자연스러운 전환점이 되었다.
"나 갱년기야"라고 당당히 외치는 '갱미아웃'이 대세가 된 이유다.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늦은 출산으로 인해 30대에 낳은 아이의 사춘기와 부모의 갱년기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부부가 동시에 갱년기를 겪는 '더블 갱년기'에 연로한 부모 부양까지 겹치는 삼중고가 일상화되고 있다.
개인의 의지나 가족의 희생으로만 버티기엔 파도가 너무 높다. 영국의 로이드 뱅킹 그룹이나 이케아(Inka Group)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갱년기 휴가 제도를 도입하고 글로벌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조직 차원의 케어에 나섰다.
한국 사회 역시 갱년기를 개인의 체력 문제로 취부할 것이 아니라, 인생 후반전을 새롭게 비축하는 축구의 하프타임처럼 제도적으로 보듬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안목자본과 휴먼엣지로 완성하는 2027년의알파십
인공지능의 바다에서 유일한 무기가 되는 안목자본
AI가 버튼 몇 번 클릭하면 글도 척척 써내려가고 그림도 기가 막히게 그려내며 제품 디자인까지 80% 이상을 완성해 주는 시대다. 그렇다면 이 만능의 기술 도구 앞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종적인 경쟁력은 과연 무엇일까.
김난도 교수가 2027년 트렌드의 종착점으로 제시한 답은 명확하다. 바로 안목자본(Taste Capital)이다.
피부과나 성형외과를 고를 때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보느냐는 설문 조사를 보면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 1위 손기술, 2위 전문의 여부를 제치고 무려 3위가 '의사 선생님의 미감'으로 나타났다.
내 얼굴을 만져줄 사람이 나와 얼마나 추구미가 일치하는지, 즉 어떤 미적 감각을 지녔는지가 병원을 선택하는 결정적 변수가 된다는 뜻이다. 병원 대기실 인테리어 속 덩그러니 놓인 오브제 하나를 보며 이 의사의 미감을 가늠한다는 젊은 세대의 태도는 이미 안목이 단순한 취향의 영역을 넘어 강력한 자본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즘 친구들에게 가장 듣고 싶은 칭찬이 "너 안목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AI가 80%를 날것으로 찍어내는 시대에 마지막 남은 20%의 격차, 즉 인간의 손길이 닿은 '휴먼엣지(결정의 엣지, 과정의 엣지, 손길의 엣지, 시간의 엣지)'를 완성하는 열쇠 역시 바로 이 안목이다.
모 회사가 올린 AI 그림에 엄청난 악플이 쏟아졌다가 그것이 모네의 진짜 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모두가 머쓱해진 해프닝처럼,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손길과 오랜 시간이 깃든 흔적에 압도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그 가치를 알아보는 눈, 무엇이 진짜 명작이고 무엇이 가짜 흉내인지 가려내는 안목이 없으면 우리는 AI가 던져주는 바다에서 길을 잃고 만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생존 무기인 안목을 어떻게 길러야 할까. 첫째, 일단 많이 보고 기록해야 한다.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찾아 눈으로 담되, 단순히 인증샷을 찍는 데 그치지 말고 "이 작품은 왜 내 마음을 흔드는지, 저건 왜 이해가 안 가는지" 치열하게 메모를 남겨야 한다. 둘째, 도슨트나 미술사가 등 전문가의 깊이 있는 해설을 학습하며 문화사적 맥락을 내면화해야 한다.
셋째, 처음에 남긴 나의 메모와 전문가의 설명을 들은 뒤의 시선을 비교하며 한 번 더 미술관을 찾아 자신의 미감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확인하는 3단계 루틴을 밟아야 한다. 안목은 타고나는 감각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단단해지는 축적의 자본이다.
💭 에디터의 단상: AI 시대의 진짜 주인이 되는 법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세상이 번거로운 효율의 논리로 도배되어도, 결국 삶의 마지막 방어선은 개인이 지닌 고유한 감각과 결단에 있다. 모두가 AI라는 똑같은 도구를 쥐고 출발선에 선 2027년, 무리에 무작정 휩쓸려 가는 양떼가 아니라 스스로 방향을 개척하는 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차이를 만드는 것은 매끄러운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속에 켜켜이 쌓인 인간의 실행력과 지독한 흔적, 그리고 무엇이 가치 있는지 알아보는 눈부신 안목뿐이다. AI가 주는 편리함에 취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기술이 부리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다가올 20th, 아니 2027년의 문턱에서 우리가 진짜 갈고닦아야 할 것은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더 깊은 생각의 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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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속도가 눈을 멀게 하는 시대일수록, 요란한 기술의 외피를 걷어내고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인간의 본질을 직시하는 일은 우리 몫으로 남는다. 2027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우리가 쥐어야 할 나침반은 차가운 효율의 계산기가 아니라,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인간의 단단한 안목과 손끝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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