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되는 법으로 파헤쳐보는 진짜 나라는 존재의 허구성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당장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와 점심메뉴를 고민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철학의 방에서 시작해 종교의 제단을 거쳐 현대 과학의 실험실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축적해 온 모든 사유는 결국 단 하나의 문장으로 수렴된다. "인류가 축적한 모든 지식과 사유는 결국 하나의 형태로 수렴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모든 학문의 종착지다. 철학도, 종교도, 과학도, 결국 이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우주 망원경으로 수조 원을 들여 138억 년 전의 과거를 파헤치는 이유도, 결국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근원을 찾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당하게 내뱉는 "나"라는 존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1990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으며, 결혼은 하지 않았고, 현재는 인플루언서로 일하고 있다"는 설명은 완벽한 이력서가 될지언정, 존재의 본질을 담아내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안녕하세요, 저는 이재범입니다. 00이 친구예요. 버스 타고 왔어요" 정도로 자신을 소개한다. 이 짧은 문장 속에 담긴 정보들은 과연 얼마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실일까.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수많은 사회적 정의와 자아의 개념은, 사실 정교하게 짜여진 거대한 허구의 모래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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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우리는 과학자가 던지는 차가운 메스 앞에 서게 된다. 감각을 통해 느끼는 것만이 진짜라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국가와 돈, 그리고 이 자아라는 개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무엇이 진짜라고 말하기 위해선, '믿음'을 넘어야 할 것이다. 다수가 동의한다는 이유로 가상의 이야기가 실재가 될 수는 없다. 지금부터 뇌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가 단단히 붙잡고 있던 '나'라는 환상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쳐 볼 참이다. 어쩌면 이 글을 다 읽고 난 후,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과 거울 속의 얼굴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사회적 약속이 빚어낸 가상의 경계

날짜와 위치, 그리고 돈의 실체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와 제도는 철저하게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의 약속 위에 세워져 있다. 당장 우리가 쓰는 달력의 기준인 '1990년'이라는 시간은, 예수가 태어난 후 지구가 태양을 1990번 공전했다는 인간들만의 약속된 숫자놀음일 뿐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의 공전은 그저 무수한 회전 중 하나일 뿐, 그 자체에 어떠한 신성하거나 절대적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서울' 역시 지구 표면에 임의로 선을 긋고 '한국'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뒤, 다시 '수도'라는 껍데기를 덧씌워 만든 가상의 경계선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상은 화폐 경제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초록색 종이에 '돈'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들이 이를 교환한다고 해서 그것이 물리적인 우주 속에서 '진짜' 실체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숲속의 오랑우탄에게 오만원권 지폐를 건넨다면, 그에게 그것은 단지 '사각형으로 각진 얇은 나무 조각'일 뿐이다. 돈은 우리가 부여한 가상의 의미일 뿐, 실체가 아니다. 1만 년 전에는 대한민국도 세상의 어떤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구의 나이는 45억 살인데, 국가는 시간과 환경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변화하는 허상에 가깝다.

사회 구성주의 이론에 따르면, 의미는 외부의 실재가 아닌 언어 내부의 참조 체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월터 리프먼이 1922년 저서 《여론》에서 지적했듯, 실제 환경은 인간이 직접 파악하기에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하여 우리는 각자 주관적이고 편향된 '의사 환경'을 구성해 살아간다. 즉,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수많은 제도와 사회적 계급은 집단적인 상호작용과 언어적 합의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개념이라고 해서, 그 가상의 이야기가 실재가 되는 건 아니다. 이 엄연한 진실을 마주할 때, 우리가 사회적 이력서에 적어 내려간 자아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운지 깨닫게 된다.

믿음의 강도와 신앙의 역설

가상의 이야기가 진실로 둔갑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인간의 '믿음'이다. 북한 주민 약 2,500만 명은 김정은을 절대적인 지도자이자 신으로 믿으며 살아간다.

"지도자께서 오시자 제 아이가 울음을 멈췄습니다", "수령님께서 제 손을 잡아주시자 제가 오랫동안 앓던 병이 나았습니다"와 같은 일화들은 그 사회 내부에서 강력한 실재로 작동한다. 외부에서 보면 강제된 세뇌의 결과로 보일 수 있으나, 인간의 심리는 종종 강제성이 없는 곳에서도 스스로 거대한 믿음의 성전을 지어 올리곤 한다.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약 26억 명의 사람들이 믿는 기독교의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00년 전 물 위를 걷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죽음에서 부활한 존재를 믿는 이들에게 예수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진짜' 신이다. 믿음의 강도가 깊어질수록 그것이 가상인지 실재인지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인지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집단적 믿음은 인간의 뇌 속 신경학적 보상 체계를 자극하여 실제 물리적 현상과 구별할 수 없는 강력한 확신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신경과학과 뇌 연구가 발전할수록 우리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공유하고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가 될 수는 없다. 수십억 명이 믿는다 하더라도 물리적 실재의 법칙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적·정치적 신념 역시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서사에 불과하다. 이 지점에서 질문은 다시 우리 자신을 향한다. 집단이 만든 믿음이 가상이라면, 그 믿음을 품고 있는 '나'라는 주체는 과연 얼마나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 사회적 자아라는 거대한 허구

우리는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 번듯한 직장, 그리고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에 우리 자신을 욱여넣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타인이 만든 거대한 가상현실의 부품들에 지나지 않는다.

돈과 국가가 그러하듯, 우리가 사회 속에서 부여받은 온갖 타이틀은 영원하지도 실재하지도 않는다.

남들이 만들어준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행세를 하느라, 정작 내 안의 진짜 감각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뼈저리게 돌아봐야 한다.

감각의 눈으로 본 '진짜'와 '나'의 실체

믿음을 넘어서는 감각의 경계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진짜란 말인가. 화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믿음의 영역을 넘어 직접 나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가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다. 무엇이 진짜라고 말하기 위해선, '믿음'을 넘어야 할 것이다. 즉, ‘진짜라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단순하지만 날카로운 기준을 우리가 만든 거대한 개념들에 대입해보면 충격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돈"이라는 개념 자체를 오감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그것을 인쇄한 '초록색' 종이의 촉감은 느낄 수 있다. "국가"를 손으로 잡을 수는 없지만, 내가 지금 두 발로 딛고 서 있는 이 아스팔트 땅의 단단함은 느낄 수 있다.

이 대조는 매우 시사적이다. 추상적인 명제들은 감각될 수 없지만, 그 명제를 지탱하는 물리적 파편들은 온몸으로 느껴진다.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타인의 따뜻한 체온이 닿는 피부는 느낄 수 있다. "윤리"라는 고결한 개념은 만질 수 없어도, 이별 뒤에 찾아오는 가슴 먹먹한 슬픔은 눈물로 느낄 수 있다.

"인권"이라는 법적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부당한 폭력 앞에서 몸이 느끼는 끔찍한 고통은 속일 수 없다. 결국 감각 가능한 것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진실의 증거가 된다.

이 기준을 '나'라는 존재에게 그대로 적용해보자. "나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하며 내 안의 '나'를 느껴보려 할 때, 과연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있는가. 내가 보는 세상이 느껴지는가? 나의 손이 느껴지는가? 꽃을 들고 냄새를 맡는 순간, '내가' 냄새를 맡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콧속을 스치는 후각적 자극이라는 '느낌'만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나'를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라는 건, '돈'이나 '국가'라는 이야기처럼,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봄'만이 느껴지고, '내가' 만지는 것이 아니라 '만짐'이라는 감각만 스쳐 지나갈 뿐이다.

샴쌍둥이와 신체 변이가 흔드는 자아의 기준

자아가 실체가 아니라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주장은 기괴한 신체적 변이 사례들을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2006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축복받은 샴쌍둥이 타티아나와 크리스타는 머리가 붙은 채 태어났다. ‘그들’의 뇌는 ‘하나’다. 한 명이 음식을 먹으면 다른 한 명도 그 맛을 느끼고, 한 명이 슬픈 영화를 보면 다른 한 명도 눈물을 흘리며, 통증까지 고스란히 공유한다. 그들은 하나의 같은 세상을 경험하면서도 스스로를 완벽하게 '둘'이라고 인식한다. 뇌는 하나인데, 어째서 자아는 둘로 쪼개져 있는 것일까.

인간의 신체적 다양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중 체로키인들은 한 손에 손가락이 여섯 개씩 있었고, 전 세계 500명 중 1명 꼴로 발생하는 다유두증을 가진 이들도 존재한다.

영화배우 잭 에프론이 여분의 유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팬들에게는 귀여운 일화로 소비되듯, 우리는 신체 일부가 남들보다 조금 많다고 해서 그 사람을 두 명의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만약 음경이 두 개인 남성이 있다면 그 각각에 이름을 붙여줄지언정, 그를 복제된 인간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뇌가 하나여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두 사람처럼 분리되어 보이면, 우린 가차 없이 그들을 두 사람으로 나누어 부른다. "타티아나"와 "크리스타"처럼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둘을 구분해서 부르니, 당사자들 역시 스스로를 두 사람으로 나누어 믿기 시작한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이 사람을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대했어도, 이 사람은 두 사람이 되었을까? 뇌는 하나이지만 스스로를 둘이라 부르는 존재들의 존재는, 자아란 결국 외부의 시선과 사회적 명명에 의해 조립된 허상에 불과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 신체 변이와 뇌과학이 말하는 단일성의 신화

의학 통계에 따르면 샴쌍둥이는 대략 10만 명 중 1명 꼴로 발생하며, 그중에서도 머리가 결합된 경우는 극도로 드물다. 이들의 뇌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감각을 공유함에도 서로 다른 인격을 주장하는 현상은, 자아의 통일성이 영혼 같은 신비로운 실체가 아니라 뇌의 정보 처리 방식과 사회적 학습의 산물임을 증명한다.

뇌의 단절과 해체: 자아라는 환상의 이면

뇌량 절단술이 폭로한 분열된 두 개의 마음

샴쌍둥이가 뇌 하나에 두 개의 자아를 가졌다면, 그 반대의 기괴한 현상도 존재한다. 우리의 뇌는 좌뇌와 우뇌,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해 정보를 주고받게 하는 통로인 뇌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각한 간질 발작을 치료하기 위해 이 뇌량을 끊어내는 '뇌량 절제술'을 시행받은 환자들에게서 현대 신경과학이 경악할 만한 현상들이 관찰된다. 뇌량이 절단된 환자는 오른손이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면 왼손이 그 옷을 집어던지고, 왼손이 밥을 먹으려 하면 오른손이 이를 저지하려는 등, 좌우 뇌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며 극심한 행동적 분열을 일으킨다.

더 놀라운 실험 결과가 있다. 뇌량이 절단된 환자의 우뇌와 연결된 왼쪽 시야에만 "걸어라"라는 명령어를 보여주면 환자는 말없이 일어나서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환자에게 "왜 일어났느냐?"고 물으면, 언어 기능을 담당하는 그의 좌뇌는 아무것도 모른 채 태연하게 거짓말을 지어낸다. "목이 말라서요!" 좌우 뇌가 소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좌뇌는 끊임없이 일어난 상황에 대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어 자신이 '하나의 일관된 나'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수술을 받은 환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면에 빠진 사람에게 "깨어나면 창문을 열어라"라고 명령한 뒤 깨우면, 그는 곧장 일어나 창문을 연다. 그리고 왜 그랬냐고 물으면 "방이 너무 더워서요!"라며 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행동인 양 당당하게 해명한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리 모순되어 보일지라도, 심지어 그 행동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명령에 의한 것일지라도, 결국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에 해석한다. 그 흔들리지 않는 이야기,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어버리는 그 허구가 바로 우리가 믿는 '나'라는 정체성이다.

질 볼트 테일러의 뇌출혈과 우주와의 합일

자아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깨지기 쉬운지는 하버드 출신의 신경해부학자 질 볼트 테일러의 극적인 체험을 통해 완전히 증명된다. 어느 날 아침, 그녀의 언어 기능을 담당하는 좌뇌에 뇌출혈이 발생했다.

왼쪽 눈 뒤쪽에서 화끈거릴 정도의 극심한 통증과 함께 몸이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좌뇌와의 연결이 끊긴 그녀의 손은 마치 원시 동물의 손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언어가 완전히 침묵하자, 그녀에게는 단지 말을 잃는 것 이상의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나'의 경계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디까지가 내 몸이고 어디부터 세상이 시작되는지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간신히 911에 전화를 걸려 해도 언어 중추가 망가진 뇌에는 숫자라는 개념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소리는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마치 '골든 리트리버가 짖는 소리'처럼 의미 없는 소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말을 잃어버린 그 극심한 공포 속에서 그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나'라는 경계가 소멸하고 우주와 하나가 된 거대한 평화에 압도되었다.

"좌뇌의 언어 중추가 기능을 멈추자,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정의할 수 없었다. 나는 말없는 연결감과 평화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위대한 고백은 우리에게 진실을 폭로한다. '나'라는 존재는 언어가 만들어낸 좁은 감옥에 불과하다. 언어 능력이 작동을 멈추고 자아라는 이야기가 꺼지는 순간, 분리된 개인이라는 착각은 사라지고 세상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거대한 실재만이 남는다.

💡 자아 해체의 핵심 순간들

  • 뇌량 절단 환자들은 좌우 뇌의 단절로 인해 서로 다른 손이 싸우는 기괴한 분열을 경험한다.
  • 최면 상태나 뇌 손상 직후 인간의 뇌는 모순된 행동을 감추기 위해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내는 해설자 역할을 수행한다.
  • 신경해부학자 질 볼트 테일러의 사례처럼 좌뇌의 언어가 멈추면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평화가 찾아온다.

동물의 본능과 언어라는 감옥에 갇힌 인간

쥐와 청어갈매기를 통해 본 '해설자'의 부재

인간의 자아가 언어가 빚어낸 허구라는 점은 동물들의 단순하고도 본능적인 실험을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어진 미로가 있다.

B지점에 맛있는 치즈를 두고 A지점에서 쥐를 투입하면 쥐는 당연히 달려가 치즈를 먹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B지점에 도착할 때 치즈와 함께 강력한 전기 충격이라는 처벌을 동시에 가하기 시작한다.

쥐는 생존을 위해 치즈를 얻으려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학습하지만, 곧 기묘한 행동적 정체에 빠진다. 치즈를 먹고 싶어 다가가지만 전기 충격의 공포가 동시에 밀려오면서, 욕망과 공포의 크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 쥐는 미로 한가운데서 그대로 굳어버린다.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 모순된 상황을 그럴듯하게 해석해 줄 '해설자', 즉 언어화된 자아가 없는 쥐는 앞으로 나아지도 뒤로 돌아서지도 못한 채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것이다.

청어갈매기의 사례도 이와 결을 같이 한다. 청어갈매기는 붉은색을 보면 공격적으로 흥분하는 본능과 알을 보면 품으려는 모순된 본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새에게 붉은색 알을 보여주면 기괴한 광경이 펼쳐진다. 알을 쪼아 공격하려 들면서 동시에 몸을 둥글게 말고 품으려 하는 모순된 행동을 동시에 수행하다가 완전히 혼란에 빠진다. 인간에게는 뇌가 두 쪽 나서 둘처럼 행동하는 극한의 상황이 오더라도 이 혼란을 깔끔하게 맥락적으로 “해설”해주는 “나”가 있으나, 쥐와 청어갈매기에게는 그런 “해설자”가 없어 보인다.

언어가 창조하고 구속하는 다중적 자아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이 모든 모순과 혼란을 언어라는 도구로 포장하여 '나'라는 일관된 이야기로 직조해 낸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나라는 건 언어에 종속된 이야기이기에, 심지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한국어에서 영어로만 바뀌어도, 아니, 서울말을 쓰다가 부산말만 써도, 다른 모습의 ‘나’가 나온다." 실제로 다중언어 구사자들은 언어를 바꿀 때마다 자신의 성격이나 가치관, 심지어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다고 고백한다. 언어라는 소프트웨어가 바뀌면, 그 안에서 실행되는 '나'라는 프로그램의 알고리즘도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결국 "나"는 허구를 믿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작가가 써낸 허구의 존재에 불과하다. 사회 구성주의가 지적하듯, 개인이란 고립된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수많은 외부의 언어적 영향과 문화적 서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하는 환상이다. 우리가 쓰는 단어, 우리가 속한 사회의 규범, 우리가 배운 역사적 내러티브가 합쳐져 일시적인 '나'라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장 근원적인 역설과 마주하게 된다. 내가 허구라면, 지금 이 세상을 감각하고 있는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찬란한 세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라는 에고의 이야기를 아무리 지우려고 지워봐도, 이상하게 세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눈앞에는 빛이 반사되고, 귓가에는 소리가 들리며, 피부에는 차가운 공기가 느껴진다. "나"라는 허구의 주체는 없는데, 무언가는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 놀라운 간극이 바로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짜 진실이다.

💭 에디터의 단상: '나'라는 허구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

우리는 평생 동안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나'라는 거대한 성을 쌓고, 그 성이 무너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하면 내가 무너지고, 누군가 나를 비난하면 존재 전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본 뇌과학과 철학의 여정은 그 모든 두려움이 허상 위에 세워진 모래성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뇌량의 단절 속에서도, 질 볼트 테일러의 뇌출혈 속에서도 증명되었듯, 언어가 만들어낸 '나'라는 이야기는 언제든 변색되고 사라질 수 있는 가벼운 환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허구가 걷힌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놀랍게도 '나'는 사라졌지만 세상은 온전히 그 자리에 남아 빛나고 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아름답고, 내 이력서와 타이틀이 무너져도 감각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평가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텅 빈 자아의 공백을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삶의 감각과 조우하게 된다. 우리를 속여 온 '나'라는 에고의 굴레를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우주와 연결되는 진정한 해방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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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왜 없지 않고 있을까? 이 오랜 질문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좁은 방을 나와 거대한 우주의 감각과 마주하게 된다. 허구의 자아가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나는 진짜 세계의 경이로움을, 오늘 하루 당신의 오감으로 온전히 느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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