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창원 소장이 자식에게 강조하는 철저한 범죄 예방 꿀팁

우리는 누구나 "저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쉽게 하고 또 듣는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맛있는 것을 사주고,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본질까지 훌륭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 진다. 😅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단면으로 딱 잘라 증명되는 물건이었던가.

프로파일러 표창원 소장이 유튜브 지식인초대석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골심히 듣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겉모습과 일시적 친절에 속으며 살아왔는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인간의 본성은 나에게 잘해줄 때 드러나는 게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이익과 옳음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로 갈린다는 진실은 뼈를 때린다.

더구나 흉악 범죄 뉴스가 터질 때마다 대중이 외치는 "쟤는 태어날 때부터 눈빛부터 범죄자였다"라는 식의 확신은 또 얼마나 폭력적이고 무지한가. 실상은 그저 우리 주변에 흔히 있던 평범한 이웃이었고, 때로는 겉보기에 멀쩡한 모범생이거나 성공한 스타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범죄는 단순히 타고나는 악마성으로 설명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환경 속에서만 자라나는 것도 아니다. 타고난 소질과 성장 환경, 그리고 본인이 내리는 선택이라는 세 가지 기묘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갈 뿐이다. 오늘은 이 위험하고도 복잡한 인간 심리의 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차근차근 짚어보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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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본성과 범죄를 바라보는 불편한 진실

잘해주는 사람의 가면과 '이익'이라는 진짜 본색

사람들은 흔히 "정말 힘든 일을 겪어봐야 그 사람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거나 "나한테 잘해주는 걸 보니 참 좋은 사람이다"라며 타인의 본질을 쉽게 재단하려 든다. 하지만 프로파일러의 눈에 비친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중학교 1학년 때 아주 가깝게 지내며 사소한 일로 싸우고 화해를 반복하던 친구가, 나중에 열아홉 살의 나이에 사형 선고를 받고 사회면에 대서특필되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의 충격은 어떤 것일까. 남을 해칠 아이가 아니라고 굳게 믿었던 내 친구가 어째서 그런 흉악범이 되었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으며 평생의 숙제를 안고 살아가게 된 사연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캠핑에서 우연히 만났던 여학교 친구가 1990년 6월 25일 유치원생을 유괴·살해한 뒤 부모에게 금품을 요구하다 같은 해 12월 사형 선고를 받은 홍순영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내 곁에 웃으며 머물던 사람이 알고 보니 거대한 범죄의 주체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얕고 표면적인지에 대한 가장 아픈 증거다.

그래서 표창원 소장이 강조하는 기준은 명쾌하면서도 서늘하다. "이 사람은 옳음보다 이익을 택하는 사람이다"라는 점을 객관화해서 파악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다정하게 대하고 내 비위를 맞춰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도덕적이고 선한 존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 친절의 기저에 나의 이용 가치나 자신의 실속 차리기라는 철저한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때 그 사람은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된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그 관계의 본질은 상대방이 쥔 저울의 눈금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통해 읽어내야만 한다. 달콤한 말과 호의 뒤에 숨겨진 계산기를 보지 못한다면, 결국 배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는 것은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범죄심리학과 생물사회범죄학의 연구 결과들을 살펴보더라도 이러한 인간의 복잡성은 그대로 드러난다. 인간의 행동 유전학적 연구나 신경생리학적 분석에서 보듯, 충동을 조절하는 전전두엽 피질과 감정을 생성하는 변연계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때 반사회적 행동이 나타날 확률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악함이 유전자로만 설명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테리 모핏의 범죄 발달 이론에서 평생 범죄자가 인구의 6%에 불과하며 이들이 범죄의 50% 이상을 저지른다는 통계가 존재하더라도, 그 숫자가 곧 누군가의 이마에 범죄자 딱지를 미리 붙여도 된다는 면죄부는 되지 못한다.

결국 타인을 향한 일방적인 신뢰나 반대로 묻지 마 식의 불신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를 너무 쉽게 재단하는 오만함에 가깝다. 💡

눈빛부터 범죄자라는 착각과 관상의 허구성

흉악 범죄 사건이 터지고 범인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될 때마다 인터넷 댓글 창은 온갖 추측과 확신으로 가득 찬다. "쟤는 눈빛부터가 살기 가득하다", "생긴 것부터가 범죄자상이네"라며 사후에 얼굴을 보고 원래 그랬을 것이라 단정 짓는 심리는 우리 사회에 아주 깊게 뿌리 박혀 있다. 만약 정말로 범죄자에게만 고유한 눈빛이나 인상이 따로 존재하고 그것을 미리 알아볼 수 있었다면, 세상의 그토록 많은 연쇄 범죄는 애초에 발생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서울 시내 한복판 원룸에 살며 이웃들과 밥을 먹고 물건을 사러 다닐 때, 그 누구도 그의 얼굴에서 싸늘한 살기를 미리 알아채지 못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였던 O.J. 심슨의 경우를 떠올려봐도 진실은 명확하다. 그가 미식축구 스타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의 얼굴과, 범죄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설 때 언론 1면에 실린 사진 속 얼굴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후자의 사진만 보면 누구나 뼛속까지 악독한 범죄자라고 확신하겠지만, 스타 시절의 그의 얼굴에서 그런 기운을 읽어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확증편향과 대중의 방어기제가 만들어낸 거대한 착시일 뿐이다. 범죄자는 우리와는 생김새부터 다르고, 평범한 이웃들과는 애초에 다른 종족일 것이라고 믿어야만 우리 스스로가 안전하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나 내 주변 사람들은 절대 저런 끔찍한 일을 겪거나 저지를 리 없다'는 착각을 지키기 위해, 언론과 대중은 악마의 얼굴을 따로 만들어내고 그 틀에 맞지 않는 평범함을 외면한다. 하지만 법정 심리학이나 범죄 심리학 연구들이 공통으로 증명하듯, 범죄자는 따로 정해진 관상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알버트 반두라의 사회학습이론이나 한스 아이젠크의 범죄성격이론에서 보듯, 인간의 행동은 복잡한 환경적 자극과 개인의 성격 특성, 그리고 수많은 선택의 누적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난 사람 볼 줄 알아, 딱 보면 안다"는 자만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무지하고 위험한 폭력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외모나 인상, 단편적인 분위기로 사람을 판단하려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프로파일러들이 사람을 대할 때 외형적인 조건보다 언어와 습관의 일관성을 살피되, 그마저도 섣부르게 단정 짓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을 만날 때는 최소한의 스크리닝 과정을 거쳐 기회를 주되,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달라서 스스로 모순을 드러낼 때 자연스럽게 거리를 둘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타인의 외면에 속지도 말고, 반대로 내 눈이 완벽할 것이라는 오만에 빠지지도 않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이 험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가장 단단한 방어막이다.

🔥 우리가 외모와 관상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범죄자의 얼굴을 보며 '역시 다르게 생겼다'고 안도하는 심리 뒤에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안을 외면하려는 비겁한 방어기제가 숨어 있다. 악마는 따로 태어나 우리 사이에 숨어든 이방인이 아니라, 평범한 교육과 왜곡된 환경, 그리고 잘못된 선택들이 빚어낸 우리 사회의 그림자일 뿐이다.

(관상이라는 편견 뒤에 숨어 진짜 사회적 원인을 지워버리는 태도를 이제는 멈춰야 한다.)

범죄를 만드는 환경과 선택의 기로

친사회적 사이코패스가 말해주는 유전과 양육의 상호작용

범죄 유전설이나 생래적 범죄자론의 역사를 보면 인류가 얼마나 원인과 결과를 단순하게 묶고 싶어 했는지 잘 드러난다. 19세기 이탈리아의 범죄학자 체사레 롬브로소는 다윈의 진화론에 심취한 나머지, 흉악범들의 신체를 측정하며 광대뼈가 튀어나왔다거나 비대칭이 심하다는 이유로 원시시대의 돌연변이가 현대에 태어난 것이라 주장했다. 물론 오늘날 이 생래적 범죄자론은 과학적 타당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하지만 죄목 중심에서 범죄자 개인의 특성을 연구하려 시도했던 그 방법론적 접근만큼은 현대 범죄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등장한 MAOA 유전자 연구나 '악마의 유전자' 논문 역시 세로토닌 분해 효소의 결함이 공격성을 유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실제 흉악범들의 척수액을 조사한 결과 일반인과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유전자는 단지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가능성일 뿐, 그 자체로 범죄자를 완성하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증명하는 사례가 바로 미국의 뇌신경학자 제임스 팰런의 연구와 그의 고백이다. 사이코패스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촬영하며 공감 능력과 도덕성을 담당하는 전전두엽 부위의 차이를 연구하던 그는, 우연히 연구실 내 자신의 뇌 사진에서도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뇌 구조를 발견했다. 깜짝 놀라 어머니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물어보았을 때, 어머니는 그가 어릴 적부터 동물을 잔인하게 다루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유전적 소질과 뇌 구조만 따지면 틀림없는 살인마가 되었어야 마땅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가 범죄자가 아닌 세계적인 뇌신경학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지극정성 어린 행동 치료에 있었다. 나쁜 짓을 할 때는 엄격하게 벌을 주고, 착한 행동을 할 때는 아낌없이 상을 주며 사회적 규범을 몸에 익히게 만든 그 따뜻하고 일관된 양육 과정이 그의 타고난 파괴적 성향을 억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물사회범죄학이 말하는 유전과 환경의 강력한 상호작용이다. 불리한 유전적 소질을 타고났더라도 긍정적인 가정환경과 올바른 양육 속에서 자란 아이는 반사회적 행동을 발현하지 않고 '친사회적 사이코패스'로 사회 규범 안에 머물며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유전적 위험이 전혀 없던 아이라 할지라도 극단적으로 폭력적이고 방임적인 환경에 던져지면 언제든 범죄의 길로 빠져들 수 있다. 결국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타고난 소질, 성장 과정과 양육 환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개인이 내리는 선택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복잡한 화학작용이다.

유전적으로 95%의 위험성을 안고 태어났더라도 나머지 5%의 올바른 환경과 본인의 의지가 결합하면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혹은 반대로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를 동시에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범죄자 자녀를 향한 사회적 주홍글씨와 편견의 폭력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범죄자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 하기보다, 범죄자라는 낙인을 그의 가족과 자녀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찍어누르는 데 훨씬 더 익숙하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녀들은 평생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사회적 손가락질을 견뎌야 한다.

학교에서 아이가 친구와 사소한 다툼이라도 벌이면 주변 어른들은 "역시 피는 못 속인다", "그 부모에 그 자식 아니겠냐"며 혀를 차기 바쁘다. 범죄자는 태어나는 것이며 타고난 기질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식의 단정적인 시선은, 불쌍한 아이들의 목을 조르는 가장 잔인한 흉기가 된다.

흉악범의 자녀들이 차가운 세상 속에서 흘리는 피눈물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우리는 이 무책임한 결정론적 편견을 거두어야만 한다.

앞서 살펴본 제임스 팰런 교수의 사례나 수많은 범죄학 연구가 입증하듯, 인간의 행동은 유전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는다. 부모가 범죄자라는 사실이 그 자녀가 반드시 범죄자의 길을 걷게 된다는 100%의 수학적 공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아이에게 어떤 환경을 제공하고, 어떤 어른들이 손을 내밀어 주느냐에 따라 인생의 궤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대중이 자극적인 보도를 통해 범죄자의 가족까지 세세히 파헤치고 사형선고를 내리듯 비난하는 행태는, 잠재적 범죄를 예방하기는커녕 오히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진짜 범죄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역효과만 낳을 뿐이다.

범죄에 대한 분노는 법과 제도를 향해야지, 아무런 선택권 없이 태어난 자녀들의 삶을 향해 쏟아져서는 안 된다.

사람의 본성을 판단하고 대처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단호하면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 "저 사람은 원래 그래", "가문이 그러니 어쩔 수 없어"라는 식으로 인간을 하나의 틀에 가두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교육과 교화가 가진 가능성 스스로를 포기하는 셈이 된다.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는 그에 합당한 법적 책임을 지우고 엄벌에 처하되, 그 주변에 남겨진 이들이나 아직 기회가 남은 아이들에게는 사회적 보호망과 올바른 행동 치료의 기회를 제공해야 마땅하다. 인간은 환경에 의해 상처받고 무너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적절한 연대와 사랑 속에서 전혀 다른 사회적 인재로 거듭날 수 있는 유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유전율 계수와 행동 유전학이 말하는 진실

행동 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반사회적 행동에 대한 유전율 계수는 대략 0.40에서 0.58 사이로 추정된다. 이는 유전적 요인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지만, 나머지 절반 가까운 영역은 온전히 환경과 개인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는 명백한 수치적 증거다.

학교폭력과 방관자의 공범화 현상

학교폭력의 거대한 90%, 침묵하는 방관者들

성인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성은 사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는 학교 교실 속 풍경을 그대로 확대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자. 판사, 검사, 의사, 대기업 임원 등 우리 사회에서 소위 잘 나간다는 어른들 대상의 강연장에서 표창원 소장이 던졌던 질문은 언제나 묵직한 침묵을 불러일으켰다. "학창 시절 주변에 단 한 건의 학교폭력이나 따돌림도 없었던 분 손 들어보세요." 그 거대한 강연장에서 온전히 손을 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어지는 질문, "피해를 겪으신 분?", 그리고 "가해자였던 분?"을 차례로 물어보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합쳐봐도 전체의 10%를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90%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바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던 '방관자'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교육 현장의 가장 부끄럽고도 적나라한 현실이다. 교실 한구석에서 친구가 괴롭힘을 당하고 영혼이 짓밟히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한테 불똥이 튀면 어쩌지?", "저 무리에 끼었다가 나까지 타겟이 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 때문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다물었던 90%의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라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부모가 되었다. 10대 청소년들은 성인처럼 스스로를 온전히 방어할 힘이 부족하기에 친구들의 무리에 부화뇌동하거나 폭력의 공포에 짓눌려 침묵하기 쉽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아이들을 길러내는 부모들의 태도다. 학교에서 친구가 괴로워한다는 아이의 말에 대다수의 부모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이렇게 가르친다. "야, 너는 거기 괜히 끼어들지 마. 피해 입어."

자식이브르고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내 아이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찍히거나 혹은 의협심을 발휘하다가 오히려 샌드백이 되는 꼴을 보고 싶은 부모는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이기적인 방어적 양육이 우리 아이들을 어떤 괴물로 키워내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힘들고 고통스러울지언정 불의를 보면 작은 목소리라도 내고, 고통받는 친구 곁에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대신, "너만 다치지 않으면 돼, 모르는 체해"라고 가르치는 사회가 과연 건강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직장 내 괴롭힘을 보고도 눈을 감는 방관자가 되고, 자기 아이가 학교폭력을 저질렀을 때 "우리 애는 그럴 리 없다"며 변호사를 대동하고 학폭위에 나타나 적반하장으로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파렴치한 부모로 진화하는 것이다.

참교육 열풍의 허상과 실질적 피해자 지원의 부재

최근 몇 년 사이 유튜브나 웹툰 등 대중문화 시장에서 '참교육'이라는 장르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현상은 매우 상징적이다. 학창 시절 친구를 무자비하게 괴롭히던 가해자들이 아무런 반성도 없이 명문대에 들어가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잘 먹고 잘사는 모습을 보며 대중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분노를 느낀다. "어떻게 저런 몹쓸 짓을 한 인간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승승장구할 수 있지?"라는 박탈감이 '참교육' 콘텐츠가 주는 사이다 같은 대리만족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해자들을 응징하고 짓밟아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사회를 뒤덮는 이유는, 공권력과 학교 시스템이 그동안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는커녕 가해자들의 눈치를 보며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가해자 부모들은 생기부에 기록이 남을까 두려워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을 불사하고, 학교는 민원이 두려워 두 손을 놓아버린 지 오래다.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들을 똑같이 짓밟아 응징하는 '일벌백계'식 집단 린치가 진정한 문제 해결이 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가해자를 괴물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 사형에 준하는 처벌을 내린다고 해서, 이미 깊은 상처를 입은 피해자의 멍든 영혼이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자극적인 복수극에 열광하며 "저 나쁜 놈 때려잡아 죽이자"고 소리를 높일 줄만 알았지, 정작 피해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실질적인 지원에는 소름 돋을 정도로 인색하다. 피해 학생이 입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안전하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국가 예산을 투입하고 전문 인력을 배치하는 시스템은 예산이 든다는 이유로 늘 뒷전으로 밀려난다. 쉬운 방법인 '가해자 악마 만들기'와 '참교육 숏폼 소비'에만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는 동안, 정작 상처 입은 아이들은 제도 속에서 방치되고 있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교육의 방향을 완전히 원점에서 다시 고민해야만 한다. 성적과 학력 중심의 입시 지옥 속에서 아이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법,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는 법, 그리고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용기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은 학교 어디에도 없다.

부모가 먼저 아이에게 "니가 피해 입을지 모르니 무조건 참아라"라고 가르치는 겁쟁이식 생존법을 강요하는 한, 학교폭력은 절대 근절되지 않는다. 가해자에게 엄정한 책임을 묻는 것과 동시에, 피해자의 상처를 보듬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아이들에게 방관자가 아닌 연대의 가치를 가르치는 교육적 대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폭력성은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유전될 것이다.

💭 에디터의 단상: 침묵을 강요받는 교실에서 배운 것들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우리 모두는 거대한 방관자 양성소에서 자라났는지 모른다. 눈에 띄면 나까지 표적이 된다는 공포가 교실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고, 어른들은 그 공포를 부추기며 조용히 공부나 하라고 타이르곤 했다.

그렇게 침묵하는 법부터 먼저 배운 아이들이 커서 만든 사회가 지금의 각자도생 헬 조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칠 때마다 씁쓸함이 밀려온다. 불의를 보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 생존 전략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과연 진정한 의미의 정의나 공동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요령 피우며 피해 가는 법이 아니라, 비록 두렵고 힘들지라도 손을 잡고 함께 버텨주는 힘이어야 한다. 🌿

관계성 범죄의 본질과 데이트 폭력의 심리학

교제 폭력의 진짜 원인: 자신감 결여와 손상된 자아

최근 몇 년 사이 뉴스 사회면을 가장 끔찍하게 장식하는 범죄 중 하나는 단연 연인 사이에 벌어지는 폭력, 이른바 교제 폭력이다. "저 사람이 싫다고 하면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면 될 텐데, 왜 저렇게 집착하고 못살게 굴며 인생을 망치려 드는 걸까"라며 고개를 내젓는 사람들이 많다. 언론이나 대중은 흔히 이러한 사건을 마주할 때 피해자가 이별을 고한 방식이나 두 사람 사이의 치정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사건을 소비하곤 한다. 하지만 프로파일러의 시선에서 가해자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그 문제의 근원에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자신의 심각한 자아 손상과 극단적인 자신감 결여가아도아도아도아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교제 폭력을 저지르는 가해자들은 대다수 성장 과정에서부터 제대로 된 존중을 받아본 경험이 없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만한 최소한의 자존감조차 망가져 있는 상태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내면의 공포와 결핍은 아이러니하게도 집착과 통제욕으로 폭발한다. 새로운 관계를 스스로 구축할 자신 없는 가해자에게 유일하게 다가온 한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인생 전부를 기괴하게 밀어 넣는다.

"이 사람은 온전히 나의 것이어야 한다"는 뒤틀린 소유욕이 발동하는 이유다. 그러다 상대방이 관계의 한계를 느끼고 이별을 통보하거나 거절의 의사를 밝힐 때,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피해자 입장에서의 거절은 그 사람이라는 인간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폭력성이나 맞지 않는 성격적 결함이라는 '특정 부분'에 대한 거부일 뿐이다. 그러나 가해자의 왜곡된 뇌 구조 속에서 이 거절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사형선고이자, 감히 나를 거부한 것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가해자는 상대방을 애정으로 되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굴복시키고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찌그러진 가치를 억지로라도 인정받으려는 불가능한 목표를 내면에 세운다. "감히 나를 거부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으니 너 역시 똑같이 고통받아야 해"라는 파괴적인 보복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교제 폭력의 본질은 사랑의 실종이 아니라, 손상된 자아가 만들어낸 끔찍한 지배욕과 자기 파괴적 집착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왜 이런 왜곡된 심리적 구조를 갖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파고들어야 하며, 피해자에게 "왜 헤어질 때 자극했냐"는 식의 2차 가해를 가하는 어처구니없는 시각은 완전히 뿌리를 뽑아야 마땅하다.

반의사불벌죄의 허점과 관계성 범죄라는 이름

이러한 범죄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우리 법제도와 수사 기관은 그동안 교제 폭력이나 가정폭력 같은 사안에 무능하고 안일하게 대처해 왔다. 과거 대한민국 법 체계에서 교제 폭력과 같은 범죄는 상당수 반의사불벌죄 혹은 친고죄의 테두리에 묶여 있었다. 이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는 순간 수사와 재판이 그대로 종결되는 구조를 의미한다. 공포에 질린 피해자가 가해자의 협박에 못 이겨 혹은 일시적인 회유에 넘어가 "저 처벌 원하지 않아요, 고소 취하할래요"라고 합의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 끔찍한 폭력범은 영웅이라도 된 듯 풀려나 더 잔인한 보복을 준비할 수 있는 구멍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국회와 법조계, 그리고 경찰이 이 범죄의 속성을 철저히 오독하며 가해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이 범죄들을 개별적인 단순 폭행이나 스토킹으로 쪼개서 볼 것이 아니라, '관계 기반 범죄(관계성 범죄)'라는 거대한 하나의 틀로 묶어서 바라보아야 한다. 관계성 범죄에는 세 가지 명확한 특성이 존재한다. 첫째, 외부에서는 그 지옥 같은 폭력 행위를 절대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피해자가 목숨을 걸고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사적 공간의 비밀은 철저히 은폐된다. 둘째, 피해자가 참다못해 경찰에 신고해 털어놓는 내용은 그가 겪은 전체 피해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신고의 목적은 보통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경찰의 힘을 빌려 이 순간만 모면하려는 절규에 가깝다. 셋째,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찰에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전 단계에서 최소 수십 번의 폭력과 가압이 반복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 "고소 유지하실 거예요?", "증거물 있어요?"라며 피해자 개인의 의지만 기계적으로 확인하려 드는 방식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가해자가 보복할까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꼴이기 때문이다.

직장, 학교, 가정 등 이미 밀접한 관계의 그물망에 갇혀 있는 피해자들을 가해자로부터 온전히 격리하고,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전한 임시 거처와 법적·경제적 지원을 패키지로 제공하지 않는다면 관계성 범죄의 악순환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가해자를 잠시 유치원에 가두었다가 풀어주는 미봉책이 아니라, 관계 자체의 권력 불균형을 해소하고 피해자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는 국가적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 관계성 범죄 대책의 핵심 요약

  • 단순한 치정이나 우발적 범행이 아닌, 손상된 자아가 낳은 지배욕과 집착의 결과물로 바라봐야 한다.
  • 반의사불벌죄의 허점을 악용해 합의를 종용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국가 주도의 철저한 피해자 분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 신고 내용이 피해의 전말이 아님을 인지하고, 숨겨진 지속적 폭력의 실체를 파악하는 전문적 수사 접근이 필수적이다.

독립적인 삶과 타인과의 적정 거리

누구에게도 절대 의존하지 않는 삶의 기술

결국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비극과 배신의 상처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프로파일러 표창원 소장이 인터뷰 말미에 거듭 강조한 메시지는 우리 삶의 태도를 완전히 뒤흔드는 묵직한 울림을 준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만나면 "저 사람은 100% 믿을 수 있어"라며 내 온 마음과 인생의 담보를 통째로 내어주거나, 반대로 상처받기 두려워 "나는 이 세상 누구도 믿지 않겠어"라며 철저히 마음을 닫아걸고 고립되는 극단적인 두 가지 태도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이 세상에 100%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타인도 없고, 그렇다고 홀로 완전히 고립되어 살아갈 수 있는 인간도 없다. 인간관계의 스펙트럼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현실적인 전제는 명쾌하다.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돌아설 수 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배신이나 변심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대처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내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 않을 정도의 여유와 안전망을 스스로의 삶에 남겨두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속이고 뒤통수를 치겠다고 작정한다면, 솔직히 우리의 힘으로 그 끔찍한 의도를 원천 봉쇄할 방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내 삶을 통째로 파괴하거나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내 삶의 주도권을 그에게 전부 위임하지 않는 태도다. "누구에게나 절대 의존하지 않는 삶을 가져야 한다"는 조언은 냉소주의나 인간불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에게 내 행복과 생존의 모든 권한을 떠넘기지 않고, 나 스스로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독립적으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도 가능하다는 역설적인 진실이다.

저 사람을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전전긍긍하며 상대방의 입맛에 나를 맞추거나, 상대방의 친절에 내 인생의 전부를 걸어버리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멈추어야 한다. 나 자신을 먼저 단단하게 세우고, 타인이 내 삶에 들어와 어떤 짓을 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내면의 체력을 기르는 것.

그것이 프로파일러가 수많은 범죄 현장과 삐뚤어진 인간 군상을 마주하며 얻어낸 가장 깊은 인생의 지혜다. 타인을 향한 맹목적 기대와 의존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의 배신 앞에서 무너져 내리지 않고 의연하게 내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프로파일러가 전하는 마지막 경고와 사유의 기록

범죄의 심리학부터 학교폭력의 구조적 모순, 그리고 교제 폭력이라는 관계성 범죄의 민낯까지 짚어보며 우리가 발견한 결론은 하나로 수렴된다. 세상의 모든 거대한 폭력과 비극은 결국 타인을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이나 뒤틀린 욕망의 도구로 삼으려는 오만함에서 시작된다.

언론이 만들어내는 범죄자의 관상이라는 환상에 속아 넘어가거나, 학교폭력을 방관하며 내 아이만 살리면 된다는 이기심에 눈을 감거나, 연인 관계라는 밀폐된 울타리 안에서 상대를 지배하려 드는 모든 일그러진 풍경들은 결국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얕고 폭력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인간의 본성은 누군가에게 달콤하게 잘해줄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비바람이 몰아치고 이익과 도덕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비로소 그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 진실을 직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에게 쉽게 속거나 상처받지 않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가해자나 방관자가 되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있다.

범죄를 예방하는 길은 단순히 흉악범을 찾아내어 참혹하게 매장하는 일회성 복수극에 있지 않다. 인간이 어떻게 망가져 괴물이 되는지 그 환경의 원인을 진지하게 분석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며, 아이들에게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용기를 가르치는 사회적 대전환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부딪히고 흔들리며 살아간다. 그 굽이치는 관계의 바다 위에서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의존한 채 위태롭게 떠내려가는 대신, 내 스스로 단단한 배를 몰고 나만의 항해를 이어갈 수 있는 독립성을 갖추어야 한다.

상처 입을 용기와 경계할 줄 아는 지혜를 품고, 타인의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선택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기르는 것. 그것이 프로파일러의 기록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뜨겁고도 서늘한 인사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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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친절과 사회의 겉모습 뒤에 가려진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때로는 불편하고 두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진짜 안전해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환상을 거두고 현실을 직시하는 힘, 거기서부터 진짜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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