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도래한 지금, 우리가 12년 동안 밤낮으로 풀었던 오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은 과연 무엇을 검증하고 있었을까. 수학 한 문항에 주어진 시간은 불과 3분 20초, 나머지 과목은 1분 30초 남짓이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정답을 빠르게 골라내는 훈련을 아이들은 반복해 왔다. 하지만 지금의 AI는 똑같은 문항을 단 1초 만에 풀어낸다. 1분 30초와 1초라는 거대한 간극 앞에서, 우리가 수십 년간 당연하게 여겨온 대입 제도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수능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관문이 과연 인간의 진짜 사고력을 측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AI가 가장 대체하기 쉬운 '규격화된 인간'을 길러내는 공장이었는지 이제는 멈춰 서서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다.
대통령의 문제 제기와 수능 논·서술형 도입 논란
2026년 대입 개편 추진 배경과 국가교육위원회의 움직임
지난 2026년 8월 5일 대통령 국가교육위원회 및 교육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현행 수능 제도를 향해 뼈를 때리는 비판을 던졌다. 과거 학생들이 답을 쓰는 능력을 길러주던 방식, 그것도 주관적 답이 아닌 객관식 오지선다형에서 답을 고르는 방식은 "초보 컴퓨터가 해도 쉽게 할 일"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방식을 고수할 것인지 물으며, AI 시대에 객관식 위주의 수능을 유지하는 것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망치는 것이라고 강하게 질타했다.
이에 대해 차정인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은 대입 제도를 바꾸어 학교 교육과 수업의 방향을 대전환해야 한다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고려할 때 현행 제도를 고수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라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이다. 곧이어 2026년 9월 4일 제9차 임시회가 개최되었고, 국가교육위원회는 대입 정책 심의·의결 권한을 바탕으로 10월 중 수능 개편안을 마련해 본격적인 여론 수렴에 돌입했다. 이르면 2033학년도 대입부터 적용을 목표로,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이 치르게 될 수능에 논·서술형 문항을 전면 도입하는 방안이 테이블 위에 올랐다.
하지만 제도의 취지가 아무리 훌륭해도 현실의 장벽은 높고 험난하다. 수십 년간 정답 찾기 교육에 익숙해진 교육계는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언론과 여론은 '현행 수능 수명 다해'라며 서술형 전환의 필요성을 보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채점 공정성과 사교육 폭발에 대한 우려를 동시에 쏟아냈다. 교육감들과 현장 교사들 사이에서도 평가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급격한 변화가 불러올 민원 폭탄과 행정적 부담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학부모와 교원 단체가 마주한 공정성과 현실의 벽
교육 현장의 반응은 그야말로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득하다. 사교육의 메카라 불리는 대치동의 학부모들을 만나보면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하다. "우리나라같이 공정하지 않은 사회에서 제일 공정했던 게 학력고사, 그다음에 수능인데..."라며 논·서술형 도입에 대해 100%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객관식 시험은 채점의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지만, 서술형으로 바뀌는 순간 채점자의 주관이나 공정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불신이 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교원 단체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교사노조동맹과 중등교사노동조합은 성명서를 통해 "시험만 바꾸면 경쟁이 사라지는가? 학교가 가르치고 평가할 조건도 함께 마련되어 있는가?"라며 뼈 있는 질문을 던졌다. 김희정 교사노조동맹 대변인은 현장 교사들 역시 수능이 수명을 다했다는 점에는 공감하지만, 이 방대한 채점 이의제기를 어떻게 방어하고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이 전무하다고 지적한다. 입시 컨설턴트 최승해 씨 역시 현시점에서 서술형 도입은 무리라고 단언하며, 오히려 사교육 시장에 새로운 먹거리를 던져주는 꼴이 될 것이라고 냉정하게 진단한다.
실제로 국가교육위원회가 자체 발주한 연구 용역에서도 채점 신뢰성 문제와 사교육 심화 가능성이라는 부정적 결론이 도출된 바 있다. 서술형 문항은 같은 답이라도 표현 방식이나 논리 전개가 달라 정답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에 따라 점수가 요동친다.
출제자가 의도한 정답의 틀에 학생의 독창적인 논리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점을 당한다면, 이는 사고력 평가는커녕 또 다른 형태의 족쇄가 될 수 있다. 결국 철저한 교원 연수와 채점 시스템 검증 없이 선언적으로 밀어붙였다가는 현장만 아수라장이 될 위험이 크다.
암기와 스킬의 대한민국, AI 시대의 생존법
산업화 시대의 표준화된 유산이 낳은 괴물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비단 수능의 형식에만 있지 않다.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이승섭 교수는 우리가 원래 교육과정에서 측정하고자 하는 역량의 절반밖에 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박태웅 국가인공지능위원회 분과장은 현재의 학교 교육 체제가 정확히 규격화, 표준화, 대량 생산이라는 산업화 시대의 유산에 기반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주입식 암기 교육을 통해 순종적이고 근면하게 예측 가능한 결과를 찍어내는 인재를 길러내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생성형 AI 시대와 교육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AI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에 만들어진 낡은 매뉴얼을 배우고 있다.
그렇게 사회로 쏟아져 나온 인재는 아이러니하게도 AI가 가장 완벽하게 대체하기 좋은 형태의 인간이 되어 버린다. 오랜 세월 세계 최고의 '패스트 팔로워'로서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고 모방하는 데 능숙했지만, 이제 앞에 쫓아갈 사람이 없는 '퍼스트 무버'가 되어야 하는 시대에 이 방식은 치명적인 결함이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 오직 정답을 빨리 찾는 기술만 연마해 온 대한민국 청년들이다. 수능 시험장 주변을 채우던 5톤 트럭 분량의 문제집들과, 문제를 읽기도 전에 선지의 패턴을 분석하는 요령들은 교육의 참된 의미를 갉아먹었다.
"1번과 5번은 절대 답으로 나오지 않는다", "투부정사는 오답으로 내지 않는다" 같은 일타 강사들의 팁이 대입의 당락을 좌우하는 현실에서, 비판적 사고나 창의력이 숨쉴 틈은 어디에도 없다.
사교육비 폭탄과 N수생 양산이라는 거대한 늪
이 지독한 주관적·객관식 스킬 위주의 입시 구조는 결국 대한민국을 거대한 N수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2027학년도 수능 N수생 응시자는 역대 최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며, 서울대 신입생 중 N수생 비율은 이미 26.9%를 넘어섰다. 특히 의대 합격자 중 N수생 비율은 58.3%에 달해, 더 좋은 점수를 위해 몇 년씩 인생을 갈아 넣는 기형적인 풍경이 일상화되었다.
정미라 진덕고 교사의 지적처럼, 이들이 N수를 통해 배우는 것은 더 넓은 지식이 아니라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며 점수를 짜내는 문제풀이 스킬뿐이다.
이 사교육 카르텔의 정점에는 대치동의 거대 대형 입시학원들이 버티고 있다. 한 관에 600명에서 900명에 달하는 수험생을 수용하고, 기본 수업료만 월 184만 4천 원에 라이브러리 사용료 39만 3천 원이 붙는다.
여기에 각종 단과반과 콘텐츠 비용까지 더해지면 한 달에 300만 원이 훌쩍 넘고, 일 년에 무려 4,000만 원에 가까운 막대한 비용이 소모된다. 부모의 경제력이 곧 학생의 성적으로 직결되는 이 구조 속에서, 공정이라는 수능의 가면은 이미 오래전에 벗겨졌다.
기업의 채용 시장은 이미 수능 성적표를 외면한 지 오래다. G마켓 리크루팅 리드 고영환 팀장의 말처럼, 대규모 공채가 사라지고 직무별 수시 채용이 대세가 된 지 오래다.
개발자에게는 실전 코딩 테스트를 요구하고, 다른 직무에서도 포트폴리오를 통해 실제 현업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그 '사고 과정'을 들여다본다. 단순한 객관식 풀이 능력은 기업에서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지 오래인데, 오직 대학 입시만 시대 역주행을 거듭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는 셈이다.
객관식의 종말과 진짜 사고력을 묻는 시간
벤자민 블룸 모형이 고발하는 한국 교육의 한계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벤자민 블룸이 제시한 인지 발달 모형은 인간의 사고 단계를 6단계로 나눈다. 1단계 기억, 2단계 이해, 3단계 적용은 저차원적 사고에 해당하고, 4단계 분석, 5단계 평가, 6단계 창조는 고차원적 사고로 분류된다. 초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었던 박도순 박사조차 인터뷰를 통해 현행 객관식 수능이 측정할 수 있는 한계는 기껏해야 기억, 이해, 적용 수준에 머문다고 솔직하게 시인한 바 있다.
문학 작품을 읽고 자신의 독창적인 관점으로 비판하거나 평가하는 능력, 복잡한 사회 현상 속에서 새로운 대안을 창조해 내는 능력은 오지선다형 시험지 위에서 점수로 환산될 수 없다. 우리가 지난 100년 가까이 고착화해 온 교육 패러다임은 고작해야 AI가 1초 만에 뱉어내는 데이터의 조각들을 인간이 쥐어짜서 외우는 훈련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승섭 교수의 말대로 교육과정이 요구하는 역량의 반쪽짜리조차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시험을 두고, 우리는 그동안 대한민국 교육이 세계 최고라 자부해 왔다.
시민단체 '교육의 봄' 신소영 공동대표의 발언은 이 허상을 정확히 찌른다. 대한민국 교육이 지난 30년간 다섯 차례나 교육과정을 개정하며 토론 수업과 프로젝트 학습을 외쳤지만 교실이 단 한 걸음도 바뀌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다.
모든 개혁이 언제나 수능이라는 난공불락의 벽 앞에서 멈춰섰기 때문이다. 평가 방식이 바뀌지 않는데 학교 현장인들 무슨 수로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수업을 시도할 수 있겠는가.
대학들의 자구책과 우리가 나아갈 방향
다행히도 변화의 조끼는 대학가에서 먼저 감지되고 있다. 서울대학교는 2028학년도 입학전형에서 수능 점수 위주의 정시 선발 인원을 2027학년도 42.68%에서 2028학년도 34.3%로 무려 7.2%포인트나 대폭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연세대와 한양대 역시 정시 비율을 30%대 초중반으로 낮추며 수능 만능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미라 교사의 진단처럼, 대학들은 이미 수능 점수만으로는 학생이 대학에 와서 어떻게 소통하고 협력하며 지식을 활용할지 그 역량을 온전히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학생부 종합전형이나 다양한 정성평가 요소들이 완벽하지는 않을지언정, 적어도 정답 찾기 기계들을 양산하는 객관식 수능보다는 인간다운 사고력을 측정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물론 서술형 도입을 둘러싼 채점 공정성의 시비, 교사들의 행정적 부담, 사교육 시장의 변종 진화 등은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AI 시대에 역행하는 1분 30초짜리 오지선다형 감옥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험의 공정성이라는 미명 아래 아이들의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력을 질식시키는 교육은 이제 끝장을 봐야 한다. 정답을 빠르게 찍어내는 능력은 더 이상 인간의 무기가 아니다.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퍼스트 무버를 길러내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교육의 미래는 AI 뒤에 숨어 낙오하는 길 외에는 없다. 수능 개편을 둘러싼 소모적인 공방을 넘어, 우리 교육이 진정으로 무엇을 평가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대수술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정답을 맞히는 기계를 만드는 교육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인간을 기르는 교육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다가올 미래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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