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희의 논; 206회] 나를 감소시키는 누군가의 죽음, 연민하지 못하는 비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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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UN 본부 건물 내부에 들어가면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 시라즈가 남긴 ‘바니 아담’(아담의 자손들)이라는 시가 벽면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이며, 하나의 본질과 영혼을 공유하도록 창조되었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들을 향해 “타인의 고통에 대해 당신이 공감하지 못한다면 당신이라는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매섭게 꾸짖는다. 과연 지금 이 순간, 전 지구를 무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거대 패권국들과 그 눈치를 보며 각자도생에 바쁜 이들 중에 이 시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싶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우리는 남의 아픔에 무감각해지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 같다. 멀리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채널을 돌리면 그만인 남의 나라 이야기로 치부되고, 국내에서는 법의 정의를 세워야 할 사법부의 수장이 권력의 눈치를 보며 제 몸 사리기에 급급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타인의 죽음 앞에서 눈을 감고, 내 코가 석 자라며 침묵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인지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다. 📉

💡 요약해보면

  • 미국과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이란 공습은 국제법을 무력화하고 무고한 민간인 희생을 낳았다.
  •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패권 다툼 속에서 한국은 맹목적 추종이 아닌 UN 중심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 조희대 대법원장의 서면 제청과 사법부의 침묵은 사법 독립을 포기한 자기치부용 방패막이에 불과하다.
  • 타인의 고통과 죽음은 곧 '나의 감소'를 의미하며, 침묵하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뿐이다.

페르시아의 시와 이란 참수 작전의 잔혹한 모순

13세기 시인의 인류애와 오늘의 미사일

13세기에 이미 인류 보편적 감각을 노래한 시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당시 찰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페르시아, 즉 오늘날의 이란 땅에서 나온 유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찬란했던 문명의 후예들이 사는 땅은 지금 미국의 무차별적인 공습과 참수 작전으로 얼룩져 버렸다. 미국은 이란 민중을 탄압하는 지도부를 교체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들이 던진 폭탄은 정작 엉뚱한 곳으로 떨어져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

트럼프 행정부가 단행한 이번 공격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3차 핵 협상이 '노딜'로 끝난 직후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은 우라늄 농축도 0% 환원, 기농축 우라늄 300kg 반납, 포르도와 나탄즈, اِس파한 등 주요 핵시설 해체뿐만 아니라 미사일 사거리 억제까지 요구했다. 이란이 이 무장 해제 요구를 주저하자 외교적 해법을 내던지고 곧바로 실력 행사에 나선 것이다. 협상이 틀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폭격을 퍼붓는 태도는 대화를 포기한 깡패 국가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국제법은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다. 유엔헌장 제2조는 자국의 국제 관계에서 무력 위협이나 행사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지만, 미국의 힘 앞에 UN은 무력한 청지기에 불과하다. 돈줄과 무력을 쥔 고약한 주인장의 변덕을 한낱 국제기구가 어찌 통제하겠는가. 결국 힘이 곧 법이 되는 정글의 법칙만이 중동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폭격 참사와 국제법의 무력함

지난 2월 28일, 이란 남부 호르모즈간주 미나브에 위치한 샤자레 타이예베 초등학교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아 무너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선한 나무'라는 뜻을 가진 이 학교는 최소 10년 이상 민간 교육기관으로 운영되어 온 곳이었으나, 과거 혁명수비대 시설이었던 탓에 구식 정보에 의존한 미군의 오폭 표적이 되고 말았다. 이 공격으로 수업 중이던 7~12살 어린이와 교사 등 무려 170여 명이 숨지는 비극이 벌어졌다. 💡

현지 언론과 인권단체들의 조사에 따르면 해당 폭격 현장 주변에서는 미국 방산업체의 이름과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USA)' 표기가 선명한 미사일 잔해가 발견됐다. 국제엠네스티는 이를 두고 사전 예방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한 전쟁범죄 가능성을 제기하며 강력히 규탄했다. 하지만 미국 국방부는 초기 사실관계 확인을 유보하다가 뒤늦게 독립 조사를 지시했을 뿐이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던 국가가 저지른 오폭의 대가는 너무나 참혹하며, 그 누구도 이 죽음에 대해 제대로 책임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노르웨이의 요나스 가르 스퇴르 총리 등 서방 동맹국들조차 이번 공습에 대해 "합법성이 없다", "국제법 영역 바깥에서 이루어졌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예일대 로스쿨의 우나 해서웨이 교수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트럼프의 무력 사용이 전 세계 권위주의자들에게 나쁜 선례를 남기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나 대만을 노리는 중국에게 면죄부를 쥐어준 꼴이라는 지적이다. 힘 있는 자가 법을 무시하고 방망이를 휘두를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무고한 아이들과 약자들의 몫으로 돌아온다.

🔥 힘으로 굴복시키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와 이스라엘은 이란을 무력으로 압박해 휴전을 이끌어낸 것을 두고 '힘을 통한 평화'라 자찬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170여 명 아이들의 주검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공포에 기반한 폭력에 불과하다. 국제법의 테두리를 짓밟고 이루어진 승리는 언제든 더 큰 보복과 파멸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다.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폭격에 대해 침묵하거나 합리화하는 태도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인질극과 한국의 외교적 원칙

미국의 파병 압박과 이란의 해협 봉쇄

미국이 이란을 무모하게 공습한 또 다른 부작용은 이란으로 하여금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황금 열쇠를 쥐고 흔들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전 세계 원유 수송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이 목줄을 이란이 틀어쥐면서 국제 유가와 밥상 물가가 요동치고 있다. 미국은 안전한 항행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다국적군을 결성해 호송 작전을 펼치려 하지만, 이는 이란 입장에서 자기 앞마당에 적국을 불러들이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다국적군의 호송선이 할 수 있는 일은 방어가 아니라 또 다른 보복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한국 정부를 향한 파병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명확하다. 미국의 깡패 같은 강압에 밀려 양자간 협상에만 매몰되거나, 국익을 핑계로 군사적 개입에 뛰어드는 것은 대단히 무책임한 망상이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UN 사무총장이 제안한 것처럼, 중립국 오만에 분쟁 완화 기구를 두고 식량과 의약품 같은 필수 재화에 한해 인도주의적 통항로를 확보하는 다자간 틀에 의존하는 것이 그나마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외교적 원칙이다. 📉

정치권 일부에서는 미국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구는 시대착오적인 친미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국익을 위해 어느 정도는 타협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달콤하지만, 그 대가로 한반도 안보의 위기를 자초하고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게 된다면 그것은 남는 장사가 아니라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정치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위기 속에서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가장 현명하면서도 강인한 원칙을 찾아내는 데 있다. 눈앞의 이익만 좇다가 대세를 그릇치는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국제사회의 이기주의와 끓는 혀를 차는 소리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파병 논란을 지켜보노라면 국제정치가 얼마나 냉혹하고 이기적인지 실감하게 된다. 이란은 자국의 생존을 위해 국제사회의 목줄을 죄고 있고, 미국은 동맹국들을 끌여들여 패권을 유지하려 혈안이 되어 있다. 이 거대한 각축전 속에서 대한민국이 취할 수 있는 스탠스는 분명하다. 힘과 이익이 지배하는 현실을 핑계로 이상론을 내던질 것이 아니라, UN이라는 다자간 협의체의 틀을 단단히 붙잡고 버텨야 한다.

만약 정부가 파병이라는 위험한 도박에 발을 담그는 순간, 우리는 중동의 화약고에 직접 뛰어드는 꼴이 된다. 유가 상승과 물류 마비라는 경제적 타격은 둘째치더라도, 멀쩡한 우리 군인들의 목숨을 강대국의 패권 다툼에 제물로 바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미국의 부당한 압박을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는 굴종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외교는 영원히 종속 변수에 머물 수밖에 없다. 😅

진정한 안보는 상대를 자극하고 힘으로 누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측 가능하고 보편적인 국제 규범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파병을 선동하거나 은근슬쩍 여론을 떠보는 세력들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통 사람들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선의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 선의를 악용해 전쟁의 수렁으로 밀어 넣으려는 정치 세력의 책동에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 냉철한 원칙이다.

📊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외교의 무게

전 세계 원유 수송량의 5분의 1이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의 단 며칠간의 봉쇄는 단순한 통계 수치를 넘어 전 세계 공급망을 마비시키고 서민들의 밥상 물가를 직접 타격한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이 위기 속에서 정부가 선택해야 할 것은 미국의 환심을 사는 일회성 파병이 아니라, 다자간 외교를 통한 실리적이고 평화적인 해법의 모색이다.

조희대 대법원의 침묵과 사법부 독립의 타락

서면 제청의 꼼수와 사법 행정의 실체

눈을 국내로 돌려보면,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여야 할 사법부 역시 풍비박산이 나 있다. 이흥구 대법관이 임기 6년을 마치고 퇴임한 지 반년이 넘도록 후임 임명이 난항을 겪어온 사태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무책임한 행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대법관 2인 공석 사태를 방치하다가, 최근 손봉기·김성수 후보자를 서면 제청 방식으로 청와대에 불쑥 던져놓았다. 청와대와의 사전 조율이라는 오랜 관례를 깨고, 정치적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책임을 떠넘긴 꼼수에 불과하다. 👀

이재명 대통령 후보 측이 손봉기 후보자에 대해 임명 동의안 제출을 거부하고 재제청을 요구한 것은 너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법관 후보 추천위원회가 추천한 인사들 중에서 더 적합한 사람을 골라 다시 제청하면 될 일을, 대법원장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윤석열 내란 사태 당시 초기 계엄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시민의 힘으로 저지되자 무임승차하고, 서부지법 폭동 사태나 계엄 판사의 어처구니없는 구속 취소 판결 앞에서는 침묵하던 모습과 판박이다.

사법 행정은 대법관들이 개별적으로 손을 댈 수 없고 온전히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의 손아귀에 집중되어 있는 구조적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그 권력을 악용해 자신의 안위와 정치적 성향에 맞는 인물들만 감싸 안으면서, 정작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헌법적 질서를 수호하는 행동에는 눈을 감아왔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부르짖는 '사법부 독립'이란 결국 자신을 임명해 준 세력에게만 한없이 너그럽고, 자신들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날을 세우는 방패막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흥구 대법관의 퇴임사와 발언의 기회를 잃은 법원

이흥구 대법관은 퇴임사를 통해 “12·3 비상계엄 후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대법원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국민들께 법원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거나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뼈아픈 자성을 남겼다. 또한 “법원이 말해야 할 때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점점 말할 기회조차 잃게 된다는 냉정한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라며, 재판뿐만 아니라 사법 행정 작용을 통해서도 적절한 시점에 국민과 소통했어야 함을 통렬히 지적했다. 신중함을 가장한 침묵은 신중한 것이 아니라 야비한 방관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이흥구 대법관 자신이 임명될 당시에도 언론과 보수 정치권은 대학생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을 물고 늘어지며 '국가보안법 위반 1호 판사'라는 프레임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독재와 맞서 싸우며 민주화를 위해 고난을 겪었던 역사를 결격 사유로 삼으려던 그 파렴치한 태도야말로, 타인을 위해 정의롭게 살아보지 못한 자들이 법을 지침 삼아 권력을 휘두르는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매번 '코드 인사' 운디하며 색깔론을 덧씌우던 이들이 정작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사들의 전횡에는 침묵했던 내로남불을 우리는 똑같이 기억하고 있다. 💡

사법부가 신뢰를 잃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 신뢰를 되찾는 것은 고통스럽고 긴 시간이 걸린다. 조희대의 대법원은 마냥 시간을 끌며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사법부의 신뢰를 스스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권력의 눈치나 보는 사법부는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 법원이 제 때 정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그 침묵의 대가는 결국 사법부 자체의 해체라는 거대한 역풍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 사법정의는 침묵 속에서 죽어간다

법관이 매일 재판하는 것만큼이나 매일 시대의 양심 앞에 재판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조희대 대법원장 체제가 보여준 일련의 행태들은 사법부가 어떻게 권력의 시녀로 전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부끄러운 교과서다. 국민이 묻고 있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는 법원은 이미 법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진정한 사법 독립은 권력과의 타협이 아니라, 오직 헌법과 국민의 기본권을 향한 단호한 행동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죽음과 나를 감소시키는 세상의 폭력

존 던의 시와 공동체적 책임의 무게

17세기 영국의 시인 존 던은 “세상 어느 누구도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태양의 한 부분이다”라고 썼다. 흙 한 덩이가 바다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모래벌 한 모래알이 유실되어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죽음은 곧 나의 감소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인류라는 거대한 대륙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면 하인을 보내 누가 죽었는지 확인하고 조문을 가던 관습에서 유래한 이 시는, 오늘날 파괴와 학살이 난무하는 지구촌을 향해 묵직한 경고를 던지고 있다. 👀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폭격에 희생된 170여 명의 아이들의 죽음은 결코 우리와 무관한 남의 일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지구촌 전체의 인류애를 갉아먹고, 우리를 더욱 각박하고 비인간적인 세상으로 밀어 넣는 '나의 감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와 직접 상관없다는 이유로, 혹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열한 핑계로 그들의 고통에 눈을 감아왔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파멸로 이끌 뿐이다.

국내의 사법부 타락과 정치적 야합 역시 마찬가지다. 법이 보호해야 할 약자들이 고통받고, 권력을 쥔 이들이 법의 심판을 교묘히 피해 갈 때, 우리 사회의 정의라는 대륙은 조금씩 바다 속으로 씻겨 내려간다. 대법원장이 책임을 회피하고 침묵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평범한 시민들의 몫으로 돌아온다. 부당함에 눈을 감고 불의에 침묵하는 순간, 우리 각자는 그 폭력의 공범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종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있을 때 책임을 다하기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려 사람을 보내지 말라는 존 던의 경고처럼, 종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울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억울한 죽음과 고통의 종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고 있다. 그 종소리를 외면한 채 나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는 인간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사디 시라즈가 시에서 노래했듯,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은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 📉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강대국의 폭력에 굴종하고 사법부의 침묵에 눈감으며 각자도생의 지옥으로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고통에 연대하고 원칙을 지키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할 것인가. 파병을 선동하고 헌법적 질서를 유린하는 세력들에게 더 이상 발 디딜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가장 현명하고 강인한 목소리로 부당함에 맞서는 것이 이 시대 우리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이자 책임이다.

종이 너무 자주, 많이, 그리고 억울하게 울리지 않도록 우리가 살아있을 때 제몫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란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스러져간 아이들의 영혼 앞에서, 그리고 침묵하는 사법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기록을 남겨야 한다. 타인의 죽음이 곧 나의 감소라는 진리를 가슴에 새기고, 연대의 손을 놓지 않는 것만이 이 암울한 시대를 돌파할 유일한 해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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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세상은 우리가 그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지옥이 될 수도,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종이 울릴 때 귀를 막지 않고 응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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