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대형 국제 스포츠 대회가 열려도 옛날처럼 온 나라가 들썩이는 풍경은 이제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2026년 9월 19일 개막해 10월 4일까지 일본 아이치현과 나고야시 일원에서 치러지고 있는 아시안게임 역시 우리 곁에서 그저 낯선 이웃나라의 행사처럼 조용히 스쳐 지나가고 있다.
한국 여자 농구 대표팀이 개최국 일본을 꺾고 금메달을 거머쥐고, 전력 차이가 뚜렷했던 사회인 야구팀과의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5연속 금메달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음에도 뉴스 한구석을 채우고 말 뿐이다.
펜싱 단체전의 극적인 역전승이나 수영, 체조, 육상, 배드민턴의 선전, 그리고 쿠라시나 스케이트보드, e스포츠 같은 신세대 종목들의 활약상 역시 과거라면 전국을 뜨겁게 달궜을 소식이지만 지금은 개인의 스마트폰 피드 속에서 알고리즘에 따라 잠시 소비되고 사라질 뿐이다.
지상파 방송 중심의 미디어 환경이 해체되고 각자의 취향을 파고드는 OTT와 소셜 미디어가 일상이 된 지금, .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쏟아지던 과도한 기대와 압박이 줄어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라도, 전 국민이 동시에 흥분하고 감동하던 커다란 결속의 자리가 비어버린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가만히 되짚어보게 된다.

스포츠와 미디어의 변주, 그리고 사라진 '우리'
아시안게임의 실종과 미디어 소비의 개인화
이번 아시안게임이 이토록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이유는 단순히 대회를 치르는 일본 아이치현과 나고야시의 미흡한 대회 운영 탓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 도쿄 올림픽 이후 일본 내 스포츠 이벤트들이 보여준 부실한 운영 사례들이 겹쳐 보이면서 개최국의 준비 부족은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 최대 광고 회사인 덴츠를 비롯해 하쿠호도, ADK 같은 민간 기업들이 주도해 온 대형 국제 행사의 위탁 방식이 한계에 부딪혔고, 지방자치단체의 힘만으로는 거대한 메가 스포츠 이벤트를 제대로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변화는 우리 자신의 미디어 소비 패턴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의 방송매체 이용행태 조사 자료나 한국미디어패널조사 결과들을 살펴보더라도,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지상파 채널을 통해 국가 대항전을 시청하던 전통적인 풍경은 이미 오래전에 저물었다.
스마트폰과 개인용 미디어가 보편화되면서 대중은 각자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익숙해졌고, 국가 간 대항전이라는 거대한 서사는 개별적이고 흩어진 취향의 파편들 속에서 힘을 잃어버렸다.
국가 간 대항전이라는 공통 문화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것은 각자도생의 고립감이다. 과거 냉전 시절의 유산이나 자본의 상업주의에 물든 과도한 스포츠 애국주의가 변질되었다는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 비판을 넘어 우리가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공동의 경험 자체를 너무 쉽게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같은 나라에서 숨 쉬고 살아간다는 아주 소박한 이유조차 서로를 겨누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는 세태 속에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정서적 기반은 점점 더 메말라가는 중이다.
애국주의의 허상과 공동체 심리의 변질
스포츠가 국가 정체성을 확인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문화적 장치로 기능해 온 역사는 꽤 깊다.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된 공동체'의 개념처럼, 실제로 얼굴을 맞대본 적 없는 수많은 이들을 하나의 소속감으로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촉매가 바로 국가대표 경기였다.
유니폼에 박힌 태극기와 경기 시작 전 울려 퍼지는 국가, 그리고 관중석을 채운 함성은 추상적인 국가라는 관념에 구체적인 숨결을 불어넣는 장치들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건강한 애국심은 종종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로 미끄러지곤 했다. 한국의 스포츠문화에 나타나는 애국주의 판타지를 분석한 연구들에서도 지적하듯, 국가와 자본, 미디어가 결합해 만들어낸 거대한 선전의 장은 스포츠의 본질을 왜곡하고 대중을 감성적으로 동원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
승리하면 영웅으로 떠받들고 패배하면 국가의 수치인 것처럼 매도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스포츠는 화합의 장이 아니라 또 다른 편가르기의 전선이 되기 일쑤였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스포츠에 무덤덤해진 세태가 오히려 다행인 것일까. 과도한 애국주의나 볼사나운 상업적 장사 속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 무덤덤함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공동체성의 해체와 맞닿아 있다는 데 있다.
고향이나 지역, 나라라는 울타리 안에서 누군가의 기쁨을 내 일처럼 여기고 슬픔을 함께 나누던 온기마저 거두어들인 자리에는, 오직 각자의 이익과 편협한 혐오만이 가득 차오르고 있다.
💡 요약해보면
- 아시안게임 등 대형 스포츠 이벤트의 관심도가 급감한 것은 개최국의 운영 미흡뿐만 아니라 미디어 소비의 개인화가 낳은 결과다.
- 국가·자본·미디어가 결합한 스포츠 애국주의는 과거 배타적 민족주의를 부추겼으나, 이를 경계하다 공동체적 연대감마저 상실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 서로를 향한 응원과 공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파편화된 개인들의 무관심과 혐오만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부산 북항의 상어 '부강이'와 인간의 이중성
인공 수로에 나타난 3.5m 야생 상어의 해프닝
아시안게임 개막을 목전에 둔 2026년 9월 18일, 부산 북항 친수공원 인공 수로에 길이 3.5m에 달하는 야생 무태상어 한 마리가 나타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영화 '죠스'를 통해 무시무시한 식인 상어로 각인된 그 생명체가 수족관도 영화 스크린도 아닌, 사람들이 산책하고 발을 담그는 도심 속 공원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기보다는 신기해하며 상어에게 '부강이'라는 다정한 애칭을 붙여주었다. 부산시는 급기야 이 야생 상어를 부산시 명예 홍보대사로 공식 위촉하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영화 속 공포의 대상이 친근한 마스코트로 변모하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은 이면을 품고 있었다.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이 상어의 출몰이 결코 반길 일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열대 바다에서나 살던 상어가 한반도 연안을 넘어 부산까지 올라온 것은 바닷물이 그만큼 뜨거워졌다는 명백한 증거이며, 우리의 목을 조여오는 기후 재앙의 경고등이 켜졌음을 보여주는 지표라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가 초래한 환경 재앙의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대중은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 앞에서 환호를 보내고 있었던 셈이다. 상어가 인공 수로에 갇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는 고통에는 눈을 감은 채, 저마다 인증샷을 찍고 행정의 홍보 수단으로 소비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곤경에 처한 동물의 처지를 진심으로 걱정하기보다 일시적인 흥밋거리로 소비하고 마는 우리의 가벼운 시선 속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왜곡된 태도가 깊숙이 박혀 있다.
동물 탈출 사건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 변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강이를 향한 대중의 시선 속에는 단순한 구경거리를 넘어선 미묘한 변화의 결이 감지된다. 과거 같았으면 공포심을 조장하며 당장 상어를 잡아들이거나 사살하라는 목소리가 거세게 터져 나왔을 것이다.
대전 동물원 늑대 탈출 사건이나 골목길을 누비던 얼룩말 세로, 도로를 질주하던 타조 타돌이의 사태를 떠올려보면 확연하다. 과거에는 동물의 탈출을 오로지 인간의 안전을 위협하는 비상사태로만 규정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최근의 대중은 달랐다. 늑구의 안전을 염려하고 동물원에 갇혀 지내야 했던 그들의 고통에 공감했으며, 다시 붙잡히더라도 구경거리로 전락하지 않고 평온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비쳤다.
부강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공 수로에 갇힌 상어를 괴롭히거나 억지로 붙잡아두려는 악의를 가진 이들은 드물었다.
하루빨리 원래 살던 넓은 바다로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과, 어쩌다 이 도심 한복판까지 흘러들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되돌아보는 윤리적 태도가 조금씩 싹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동정심을 넘어선다. 인간 중심적인 이기적 시선에서 벗어나 자연과 동물을 공전의 대상으로 바라보려는 사회적 감각이 비로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부강이를 바다로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작업뿐만 아니라, 이 상어를 우리에게 보내온 근본적인 원인인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실천으로 나아가는 정책적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자연의 경고를 소비하는 인간의 잔인한 낭만
부산항에 나타난 상어 부강이를 향한 대중의 열광은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재앙의 전조를 일시적인 이벤트로 소비하는 우리 시대의 모순을 보여준다. 바다가 뜨거워져 도심 수로까지 밀려온 생명의 신호를 걱정하기보다 인증샷의 소재로 삼는 이기심은, 결국 자연을 타자화하고 파괴하는 혐오의 정서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소셜미디어 시대의 정치 양극화와 혐오의 증식
가짜뉴스 논란과 트럼프식 언론 탄압의 그림자
세상에는 짜증과 분노, 억울함이 넘쳐나고,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며 좌표를 찍어 응징하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이토록 함께 기뻐하고 마음 따뜻해지는 일에는 인색해진 반면, 서로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일에만 광적으로 매달리게 된 배경에는 소셜 미디어가 지배하는 정치적 양극화의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대서양 건너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가짜뉴스를 암에 비유하며 주류 언론들을 통제 불능의 위험 세력으로 규정하고 백악관 출입을 금지한 사건은 이러한 현상의 극단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트럼프는 구체적인 근거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CNN이나 MSNBC, 폴리티코 같은 언론사 기자들의 출입증을 강제로 회수하며 언론을 향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정치적 공세가 단순히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전 세계를 연결한 이후, 정치는 공통의 토론과 타협의 공간을 상실하고 오로지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전쟁터로 변질되어 버렸다.
한국의 언론과 제도권 정치 역시 이 거대한 혐오의 산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겉으로는 극단주의를 반대하는 척 점잖은 체를 하면서도, 뒤로는 소셜 미디어의 극단 유튜버들보다 더 비겁한 방식으로 혐오를 선동하고 부추겨 왔다.
특히 지난 내란 국면을 거치며 제도권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헌정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기득권 언론과 정치 세력은 제 역할을 다하기는커녕 눈치를 보며 침묵하거나 동조하기 바빴다.
진보와 보수의 본질을 상실한 한국 정치의 딜레마
이러한 정치적 파탄 속에서 진보 진영 역시 깊은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반민주적 세력의 폭거에 저항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들도 모르게 혐오와 조롱을 내면화해 버린 것이다.
거친 표현과 원색적인 비난이 마치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훈장이라도 되는 듯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며, 정작 세상을 바꿀 실질적인 대안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과거의 진보는 체제를 바꾸고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건 절박한 투쟁을 이어갔던 역사적 부채를 안고 있었다. 왕정을 공화정으로 바꾸고, 식민지에서 독립을 이뤄내며, 가난한 농촌 사회를 산업화와 민주화의 반석 위에 올려놓는 과정은 모두 피 흘리며 이뤄낸 진보적 성취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정치는 그 역사적 무게감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무엇을 바꿔야 할지 망각한 진보와 무엇을 지켜야 할지 부정하는 보수만이 남아서 서로를 물어뜯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양비론적 시각에서 이 모든 사태를 단순히 양쪽 극단주의의 대립으로 치부하려는 태도 역시 비겁하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의 극단적 갈등과 혐오의 확산은 그 책임의 무게가 결코 양쪽에 동일하게 돌아갈 수 없다.
기존의 보수 정당과 민족주의 우파를 집어삼키며 세력을 불려온 극우 세력이 무한 증식해 온 혐오의 정치가 이 사태의 주된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 혐오가 지배하는 공론장의 성적표
소셜 미디어가 일상화된 이후 정치적 양극화 지수는 전 세계적으로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타인을 향한 공감 능력은 급격히 감퇴하는 반면, 분노와 적대감을 자극하는 콘텐츠의 유통 속도는 기존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공론장이 토론의 장소가 아니라 혐오의 격전지로 전락한 이 통계적 현실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운 지점에 처해 있는지 냉정하게 고발하고 있다.
역사의 왜곡과 공동의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자해적 정치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보수 세력의 이중 잣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러한 자해적 정치의 민낯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근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란이 대표적이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참칭하는 세력은 이 영화가 전직 대통령과 영부인을 모멸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과거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역사 왜곡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는 단체로 관람하며 열광적으로 추켜세우던 자들이, 정작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게 접근한 창작극에 대해서는 발작적인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굳이 이런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자처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역사적 사실을 민주적 공동체의 교훈으로 삼아 반성하기는커녕, 내란의 후신이자 본체인 정당을 중심으로 부끄러운 과거를 덮고 어떻게든 보수 세력을 재건해보겠다는 얄팍한 속셈 때문이다.
공통의 역사적 기억과 민주 공화정의 가치관 위에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기보다, 그 공통의 기반 자체를 박살 냄으로써 정치적 동력을 얻으려는 전형적인 자해 공갈단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영화 '서울의 봄'이 내란의 상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힘을 주었듯, '암살자들' 역시 권력의 탄압과 은폐에 맞서는 언론의 진정한 가치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역사란 오로지 정파적 이익을 위한 도구일 뿐이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왜곡하고 사회적 신뢰의 자산을 갉아먹는 길을 택하고 있다.
혐오의 언어를 거두고 공전의 감각으로 나아가기
우리는 지금 너무나 많은 공통의 것을 잃어버렸다. 함께 좋아하는 대상도, 함께 응원하는 누군가도,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만한 모종의 성취와 상실도 모두 안개처럼 흐릿해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휴대폰 화면 속에서 번식하는 비인간적인 분노와 적대감뿐이다.
이제는 그 분노의 에너지를 휴대폰 바깥으로 끌어내어,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웃과 자연을 아우르는 공전의 감각으로 바꾸어 흘려보내야 한다. 험한 세상을 잠시 잊게 만드는 일회성 미담 소비에 그치지 않고, 서로를 관대하게 품어줄 수 있는 사회적 여유를 되찾아야 한다.
정치가 분열과 혐오를 부추기는 구조를 방관한다면 우리의 삶은 언제까지나 팍팍하고 건조할 수밖에 없다.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무너뜨리는 정치를 끝내고, 더 나은 환경과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마주할 수 있는 정책적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
그 길만이 잃어버린 '우리'를 되찾고, 삶의 소소한 재미와 진정한 행복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 에디터의 단상 : 혐오의 시대를 건너며
매일같이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분노를 소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처단해야 할 적로 규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타인을 향해 좌표를 찍는 일은 이제 너무 손쉬운 놀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소셜 미디어를 달구는 혐오의 언어들이 우리 삶을 조금이라도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오히려 삶은 더 팍팍해졌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는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부산항에 찾아온 상어 부강이를 보며 신기해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쩌면 삭살대로 삭아버린 일상 속에서 무언가 살아있는 생명과 교감하고 싶었던 간절함이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기후 위기가 낳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 채 구경거리로 소비한 것은 씁쓸하지만, 적어도 그 생명을 해치지 않고 무사히 바다로 돌려보내기를 바랐던 그 마음만큼은 아직 우리 안에 공감의 불씨가 남아 있음을 증명한다.
정치가 자꾸만 우리를 편 가르고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더라도, 그 혐오의 장벽을 넘어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공전의 감각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비록 삶이 고달프고 세상이 어지러워도, 서로를 향한 최소한의 연민과 다정함을 잃지 않으면서 우리만의 소소한 행복을 끝까지 지켜내고 싶다.
📚 이 글이랑 같이 보면 좋은 글
서로를 향한 비난과 손가락질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공감과 연대의 자리를 다시 넓히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는 미룰 수 없는 시대의 과제다.
#정준희 #아시안게임 #미디어변화 #공동체 #혐오정치 #정치사회 #이슈 #시사 #통찰 #한국정치 #미디어환경 #사회분열 #공감 #연대 #알고리즘 #스마트폰피드 #오피니언 #시사평론 #이슈분석 #사회적갈등 #국가대표 #스포츠정신 #상어부강이 #가짜뉴스 #언론탄압 #진보보수 #역사왜곡 #영화암살자들 #소셜미디어 #시대과제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