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꼭 알아야 할 10월 항쟁 80주년의 진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한국 현대사의 시작은 대개 6.25 전쟁이거나, 아니면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도 광복 이후의 혼란스러운 정국 정도로 어설프게 배웠던 기억이 난다. 해방의 감격도 잠시, 그 짧은 과도기에 이 땅의 보통 사람들이 무엇을 꿈꾸고 어떻게 저항했는지에 대해서는 교과서의 아주 작은 주석 한 줄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셈이다. 10월 항쟁 80주년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곡점을 마주하며 유튜브 영상 속 채영희 유족회장과 박석준 집행위원장의 목소리를 듣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뻐근해져 왔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대구에서 불을 지펴 전국으로 번졌던 그 거대한 함성이 올해로 벌써 80년을 맞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10월 항쟁은 그 이름조차 생소하거나, 혹은 오랫동안 왜곡된 채 방치되어 온 비운의 역사로 남아 있다.

지자체의 지원은커녕 눈길조차 받지 못한 채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과 손길로 이 묵직한 80주년 기념 행사를 치러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새삼 서늘한 경고처럼 다가왔다. 💡

본문 이미지 1

해방 공간의 거대한 함성, 10월 항쟁의 실체

해방 이후 최초의 민중항쟁이라는 역사적 무게

해방 직후의 정국은 그야말로 혼돈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찌꺼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군정이 들어섰고, 그 치안 공백과 식량난 속에서 민중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채영희 10월 항쟁 유족회 초대 회장은 이번 유튜브 방송을 통해 이 사건이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해방 이후 최초의 민중항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차분하게 짚어냈다. 당시 대구의 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정권을 탐하던 정치인들이 아니었다. 당장 오늘 먹을 쌀 한 톨이 없고,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는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한 굶주린 백성들이었다.

역사책은 흔히 이 시기를 좌우 갈등의 격동기라는 거대 담론으로 포장해 버리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살기 위해 거리로 나와야 했던 평범한 이들의 절박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채 회장이 증언하듯, 이 항쟁은 새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순수한 열망이 폭발한 한반도 최초의 집단적 저항이었다.

그러나 이 최초라는 수식어 앞에는 늘 국가폭력에 의해 지워진 상처와 침묵이 따라붙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그 시절 민중이 꿈꾸었던 인간다운 삶의 흔적이다. 👀

국가 권력은 늘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따라 기록의 펜을 달리 휘둘러 왔다. 승자의 기록 속에서 10월 항쟁은 오랫동안 폭도로 매도되거나 은폐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해방 공간에서 터져 나온 대중의 목소리를 이토록 철저히 지워버린다고 해서 그 진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80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그날의 함성을 온전히 부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우리 현대사의 가장 부끄러운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230만 명이 참여한 거대한 항쟁의 불씨

박석준 10월 항쟁 80주년 행사위원회 집행위원장이 밝힌 숫자는 귀를 의심케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약 230만 명의 민중이 참여했다는 대목에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가 2천만 명도 되지 않았던 시기임을 감상해 보면, 전체 인구의 1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셈이다. 이건 영남 지역의 국지적인 소요 사태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민중 총궐기였다.

이 거대한 숫자가 주는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당시 미군정과 친일 경찰의 서슬 퍼런 탄압 속에서도 230만이라는 대중이 움직였다는 것은, 그만큼 민중의 분노가 임계점을 훌쩍 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그들의 의지는 결코 소수 지식인들의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뼈저린 생존의 요구였다. 박 집행위원장의 설명처럼 이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 전체를 관통하는 민주화 운동의 뿌리이자 가장 뜨거운 불씨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4.19 혁명이나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에 비해서 10월 항쟁은 그동안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한 채 역사 교과서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230만 명의 발걸음이 만들어낸 메아리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토록 작게 들린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의 역사 인식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이다.

유족들이 겪어야 했던 뼈아픈 세월

20대 청년들과 그 어머니들의 눈물

채영희 유족회장이 전하는 당시의 풍경은 팩트라는 차가운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10월 항쟁 당시 목숨을 잃거나 희생된 이들은 대부분 꽃다운 20대의 대학생과 청년들이었다. 그리고 더 가슴이 미어지는 대목은 그 자식들을 떠나보낸 어머니들 역시 고작 20대의 젊은 나이였다는 사실이다. 젊은 남편을 잃고, 품에 안긴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그 참혹한 세월을 과연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국가폭력의 진짜 잔인함은 사람을 죽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남겨진 이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하는 데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그들은 연좌제라는 족쇄에 묶여 사회적 매장을 당해야 했다.

남편을 잃은 슬픔과 자식들을 지켜내야 하는 고통 속에서 그들이 흘린 눈물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마르지 않았다. 영상 속에서 담담하게 그 시절을 회상하는 채 회장의 목소리에는 평생을 짓눌러 온 세월의 무게가 그대로 묻어났다. 🥺

국가가 가해자였고, 피해자들은 평생을 숨어 살아햐 했던 그 부조리한 구조.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억울한 죽음들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방패를 세우기 위함이다. 20대의 청년들과 그 어머니들이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단순한 과거의 아픔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밑바닥에 깔린 피와 눈물의 다른 이름이다.

빨갱이 낙인이라는 지독한 고통의 역사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빨갱이'라는 세 글자가 가진 폭력성은 그 어떤 흉기보다 잔인했다. 10월 항쟁의 유족들이 겪어야 했던 삶은 그 낙인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었다. 평생을 빨갱이 유족이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온 이들에게 세상은 거대한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취업을 할 수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으며, 언제 어디서 국가의 감시와 주변의 손가락질이 날아올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다.

박석준 집행위원장이 지적했듯, 그동안의 역사 연구나 기념 사업은 주로 거창한 영웅주의적 관점이나 정치적 사건 전개에만 집중해 왔다. 역사책에 기록된 몇 줄의 평가 뒤편에서 유족들이 어떻게 삶을 유린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국가에 의해 가족을 잃고, 다시 국가에 의해 뼛속까지 짓밟힌 그 세월은 어떤 보상이나 사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상처다. 📉

우리가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말하고 인권을 이야기하려면, 이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겪었던 뼈저린 일상적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빨갱이 낙인을 찍어 입을 다물게 만들었던 그 비열한 권력의 카르텔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사회의 음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살아남아 있다. 10월 항쟁 유족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은 곧 그 부당한 낙인과의 본격적인 절연을 의미한다.

80주년 기념 행사의 다채로운 준비 과정

추념식과 '울림' 콘서트가 지닌 중의적 의미

이런 깊은 상처를 위로하고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기 위해 '10월 항쟁 80주년 행사위원회'가 팔을 걷어붙였다. 박석준 집행위원장이 소개한 이번 80주년 행사는 단순한 일회성 추모를 넘어 전국적인 기억의 연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오는 10월 1일의 엄숙한 추념식과 10월 3일에 열릴 '울림' 콘서트는 그 치밀한 준비의 결정체다. 특히 '울림'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이 깊고 날카롭다.

경상도 사투리에서 '울림'은 울부짖는다는 의미의 '울린다(Cry)'와 소리가 퍼져나간다는 의미의 '메아리(Echo)'라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한다. 80년 동안 억눌려 통곡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유족들의 울음을 이제는 세상 밖으로 터뜨리겠다는 것, 그리고 그 슬픔의 메아리가 대한민국 방구석 방구석까지 퍼져나가게 만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

문화예술과 역사가 결합된 이러한 추모 방식은 딱딱한 학술대회보다 훨씬 더 많은 대중의 가슴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노래와 연극, 그리고 낭송을 통해 그날의 아픔을 공감하고 나누는 과정 자체가 거대한 치유의 장이 된다.

지자체나 거대 자본의 지원 없이 오로지 시민들의 뜻으로만 이 모든 무대를 꾸려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울림' 콘서트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작은 항쟁이자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지자체 지원 없이 시민들의 힘으로 치르는 이유

가장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바로 재정의 현실이다. 박석준 집행위원장의 토로에 따르면, 이번 80주년 행사는 지자체의 예산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순전히 시민들의 모금으로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약 4천만 원 정도가 모금되었지만, 80주년 이라는 상징성과 전국적인 행사 규모를 감안하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라는 호소였다. 📊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진작에 대규모로 기리고 진상을 규명했어야 마땅할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정권의 성향에 따라, 혹은 지역의 정치적 눈치 보기 때문에 공적 자금은커녕 기본적인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결국 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이름 없는 평범한 시민들의 십시일반에 기댈 수밖에 없는 모양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후원과 참여가 더 큰 의미를 갖는 게 아닐까 싶다. 권력이 외면하고 예산이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는 것은 결국 우리들 자신의 손이기 때문이다. 4천만 원이라는 모금액 뒤에 담긴 수많은 시민들의 정성 어린 손길은, 국가가 지우려 했던 역사를 민중의 힘으로 기어이 되살려내겠다는 가장 강력한 연대의 증거다.

후원 계좌 안내와 진실을 향한 마지막 당부

10월항쟁 80주년 행사위원회 후원 동참하기

유튜브 영상의 후반부에서 진행자는 자막과 함께 구체적인 후원 경로를 상세히 안내했다. IM뱅크 505-10-262643-0, 예금주는 '10월항쟁80주년연대(결성준비)'라는 계좌번호는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실천의 지점이다. 해방 후 첫 민중항쟁의 역사를 기리고, 그 시절 스러져간 영혼들과 유족들의 찢긴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에 지갑을 여는 것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다.

우리가 건네는 작은 후원금은 80년 동안 음지에 방치되었던 진실의 목소리를 양지로 끌어올리는 가장 확실한 지렛대다. 거대 언론이나 정부가 보도하지 않는 진실을 시민들의 힘으로 기록하고 알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각지에서 손을 맞잡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나누어 지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살아있는 시민들이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

후원 계좌의 숫자를 적어 내려가며, 과연 나는 이 부채감을 얼마나 덜어내며 살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역사는 책장에 꽂힌 낡은 활자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통장 잔고와 발걸음으로 증명되는 현재진행형의 과제다. 10월 항쟁의 진실이 더 이상 잊혀지지 않도록, 그리고 유족들이 눈물 닦고 당당히 설 수 있도록 이 작은 후원 행렬에 동참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에 가깝다.

죽기 전에 진실이 기록되기를 바라는 유족의 간절함

채영희 유족회장이 남긴 마지막 발언은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무거운 울림이었다. "죽기 전에 이 역사가 진실되게 기록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그 한마디는 평생을 억울함 속에 살아야 했던 모든 유족들의 한 맺힌 유언이자 부탁이었다. 여든을 바라보거나 이미 그 훌쩍 넘어버린 나이에, 그들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보상이나 명예가 아니었다. 오직 자신들의 아버지와 남편, 자식이 왜 그토록 억울하게 죽어야 했는지 그 진실이 역사책에 똑바로 적히는 것뿐이다.

국가폭력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잔인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진실은 바래지고, 가해자들의 침묵은 더욱 뻔뻔해질 뿐이다.

채 회장의 그 간절한 눈빛을 마주하고도 우리가 모른 척 지나친다면, 우리는 역사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 80주년을 맞이한 지금이 아니면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시간조차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 📉

진실은 가만히 두면 저절로 밝혀지지 않는다. 누군가 증언하고, 누군가 기록하고, 또 누군가는 그 비용을 대며 지켜내야만 겨우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10월 항쟁의 80년은 비극의 역사이지만, 동시에 그 비극을 우리의 손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채 회장의 그 떨리는 당부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메아리쳐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 요약해보면

  • 1946년 10월 1일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 230만 명이 참여한 해방 후 최초의 민중항쟁이다.
  • 희생된 20대 청년들과 그 어머니들은 평생 '빨갱이' 낙인과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 지자체 지원 없이 시민 모금으로 치러지는 80주년 행사를 위해 후원 참여가 절실하다.

🔥 역사가 지워버린 자국을 외면하는 국가의 침묵

23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공식 역사는 10월 항쟁을 오랫동안 침묵과 왜곡의 상자로 밀어 넣었다. 국가가 폭력을 행사하고 그 상처를 방치하는 사이, 유족들은 평생을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왔다.

지자체의 예산 한 푼 없이 시민들의 모금으로만 80주년 행사를 치러야 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이 여전히 얼마나 빈곤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가가 외면한 진실을 시민의 힘으로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은, 부끄러운 과거를 딛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책무다.

📊 230만 명의 함성과 4천만 원의 무게

전체 인구 2천만 명 미만이던 시기에 230만 명이 참여했다는 수치는 이 항쟁이 얼마나 폭발적인 대중적 기반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뼈아픈 증거다. 그러나 80년이 지난 지금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모인 후원금은 고작 4천만 원 남짓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지자체의 도움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 정성으로만 채워지고 있다.

이 숫자들의 간극은 곧 우리 사회가 역사적 부채를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씁쓸한 지표다.

💭 에디터의 단상 : 우리가 10월 항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이름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사건들이 알고 보면 우리 현대사의 가장 뜨거운 피 흘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밀려오는 부채감은 어쩔 수가 없다. 10월 항쟁 80주년이라는 단어를 모니터에 적어 내려가며, 나는 과연 이 땅에서 억울하게 쓰러져간 이들의 눈물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는지 자문해 보게 된다. 젊은 아들을 잃고 20대의 나이에 가슴에 대못이 박혔던 어머니들의 세월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짓밟힌 삶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

권력이 기록하지 않고 언론이 침묵하는 역사는 결국 돈과 권세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손으로 직접 건져 올려야만 한다. 지자체 한 푼의 지원도 받지 못해 시민들의 쌈돈을 털어 80주년 추념식과 '울림' 콘서트를 준비한다는 소식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만, 동시에 아직 우리 사회에 희망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죽기 전에 진실이 제대로 기록되기를 바란다는 채영희 회장의 그 절박한 바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작은 관심과 후원이 그 메아리의 시작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는 지나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떤 태도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비추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기 때문이다. 💡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80년 전 대구의 거리를 뒤흔들었던 그 뜨거운 함성이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사라지지 않도록, 이제는 우리가 그 메아리에 응답할 차례다. 진실은 스스로 걸어오지 않고, 기억하려는 이들의 발걸음 속에서 비로소 살아 숨 쉰다.

#10월항쟁 #10월항쟁80주년 #한국현대사 #대구10월항쟁 #해방공간 #민중항쟁 #역사공부 #역사기억 #채영희유족회장 #박석준집행위원장 #울림콘서트 #후원안내 #역사왜곡바로잡기 #진실규명 #유족아픔 #시민모금 #역사적진실 #잊지않겠습니다 #현대사기록 #10월항쟁행사 #im뱅크후원 #역사스냅 #근현대사 #민중의함성 #기억하는이들 #역사의메아리 #평화와인권 #진실의목소리 #역사탐방 #함께해요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