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수의 인수분해 13화 - SNS와 검찰, 그리고 유시민 미디어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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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의 문턱을 넘는 검사들의 발소리가 다시금 거세지고 있다. 한때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던 '법무부 탈검찰화'는 이제 박제된 과거의 유산이 된 것일까.

엑셀 시트에 빼곡히 적힌 검사 배치 현황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검찰 개혁이라는 거대한 명분이 어떻게 현실의 촘촘한 그물망에 걸려 좌초되었는지 목격하게 된다. 오늘은 법무부 주요 실·국·본부에 다시금 똬리를 튼 검사들의 현주소를 통해, 검찰 개혁의 역행과 그 이면에 숨겨진 권력 지형을 낱낱이 해부해보고자 한다.

법무부 내부 검사 배치, 탈검찰화는 어디로 갔나

검사들이 점령한 법무부 주요 실·국

법무부 내부의 검사 배치 현황은 그 자체로 숫자가 말해주는 '재검찰화'의 증거다. 법무부 검찰국은 전체 정원 127명 중 무려 98명이 검사다. 감찰관실은 32명 중 15명, 법무실은 196명 중 67명이 검사로 채워져 있다. 특히 법무실 내부의 법무과, 법무심의관실, 송무심의관실 등 세부 부서의 면면을 보면 그 쏠림 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법무과장, 통일법무과장, 상사법무과장, 법조인력과장, 국가소송과장, 행정소송과장, 그리고 북한인권기록보존소장까지 예외 없이 전부 검사다. 이는 단순히 인력 배치의 문제가 아니라, 법무부라는 행정기관의 정책 결정권 전체를 검찰 조직이 장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권국과 국제법무국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인권국은 77명 중 30명이 검사이며, 인권구조과장, 인권조사과장, 여성아동인권과장, 범죄피해자통합지원센터장 등을 검사가 독차지하고 있다. "이런 자리까지 굳이 검사가 가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이제 사치가 되었다. 국제법무국 역시 국장급을 제외한 국제법무정책과장, 법무지원과장, 투자분쟁과장 등이 검사들로 채워졌다. 문재인 정부 시절 '법무행정의 전문성 확보'와 '검찰의 수사·기소 독점 해소'를 위해 추진했던 탈검찰화 정책이, 지금에 와서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히 무력화되었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인사 관행이 아니다. 특정 전문직이 모든 요직을 독점하는 구조는 그 자체로 행정의 민주적 통제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법무부가 검찰을 지휘하고 감독해야 할 상급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내부 인적 구성이 검찰 조직의 연장선상에 있다면 누가 누구를 견제할 수 있겠는가. 결국 법무행정의 독자성은 사라지고 검찰 내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대한 '검찰 사령부'로 변질된 셈이다. 이처럼 법무부의 실질적인 탈검찰화는 명분이 아닌, 완전히 역행하는 정책적 실패로 귀결되고 있다.

국정과제였던 탈검찰화의 처참한 성적표

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 중 하나였던 '법무부의 불가역적 탈검찰화'는 말 그대로 공염불이 되었다. 당시 정책은 법무부 내 보직 검사와 파견 검사를 감축하고, 그 자리를 특정직 법무관 등으로 대체하여 검찰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것이 골자였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윤석열 정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권국과 국제법무국 등 굳이 검사가 필요 없는 자리까지 다시 검사들로 싹 다 채워 넣었다. 이는 단순히 이전 정부의 정책을 뒤집는 수준을 넘어, 본인들이 공언했던 '검찰 개혁'의 원칙을 스스로 파괴한 행위다. 화자의 지적처럼, "정확하게 본인이 약속한 정 반대로 했습니다."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검찰의 권력 독점을 막고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겠다는 거창한 슬로건 뒤에서, 실상은 검찰 조직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인사 포석이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이는 근거 없는 비방이 아니다. 엑셀 파일에 담긴 인력 배치표라는 객관적 팩트가 증명하는 서글픈 현실이다. 법무부는 이제 더 이상 공정한 법치 행정을 수행하는 기관이 아니라, 검찰 조직의 기득권을 수호하고 영향력을 전 사회로 확장하는 전초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검찰 개혁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려는 노력은 권력의 오남용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법무부의 요직을 검사가 독식하는 구조에서는 그러한 안전장치가 작동할 틈이 없다. 인적 구성의 편향은 곧 정책 결정의 편향으로 이어지며, 이는 결국 국가 시스템 전체의 건강성을 해친다. 지금의 법무부는 검찰의 거대화된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한 플랫폼 역할을 자처하고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견제와 균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태다.

🔥 불가능한 견제, 검사 놀이터가 된 법무부

법무부의 탈검찰화가 실패한 이유는 단순히 검사를 교체하는 인사의 문제를 넘어, 이다. 특히 수사·기소 분리라는 개혁의 알맹이는 사라지고, 검찰 출신들이 다시 법무부 요직을 '셀프 임명'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는, 민주적 통제를 거부하고 오직 자신들의 카르텔을 보호하려는 폐쇄적인 조직 논리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재검찰화는 단순히 인사상의 오류를 넘어 우리 사회가 쌓아온 사법 개혁의 역사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퇴행이다.

검사 파견 네트워크와 수사 통제 시스템

금융위를 장악한 27명의 파견 검사들

검찰의 영향력은 법무부 울타리를 넘어 각 부처로 뻗어 나간다. 2026년 9월 18일 기준, 무려 18개 기관에 27명의 검사가 파견되어 있다. 이들이 왜 타 부처에 상주하는가. 단순히 업무 협력을 위해서라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부처 내 네트워크 구축과 소위 '캐비닛'이라 불리는 정보 수집에 있다. 특히 금융위원회에 파견된 6명의 검사는 주목해야 한다. 금융위와 금감원은 재벌 기업의 출자 구조와 금융 범죄를 다루는 곳으로, 검찰 입장에서는 가장 '돈이 되고' 영향력이 큰 사건들이 생산되는 노다지와 같다. 검사들은 파견된 부처의 특별사법경찰(특사경) 수사를 직간접적으로 관장하려 한다. 수사권 조정 이후에도 검찰은 특사경이 하는 수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두었다. 수사개시 통보 규정이나 제22조의 '지도·조언' 권한을 통해 검사는 사실상 수사 지휘권을 행사한다. "말이 좋아서 협력이지, 검사가 시키는 대로 해라는 것"이라는 현장의 목소리가 이를 방증한다. 검찰의 파견은 단순히 인력 지원이 아니라, 정부의 모든 행정 영역을 검찰의 수사 범위 내에 두려는 권력적 확장이다. 우리는 왜 검찰이 이렇게 각 부처로 파견을 보내려 하는지 짚어봐야 한다. 검찰은 스스로를 '공익의 대변자'라고 칭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사권이라는 강력한 칼을 쥐고 국가 정책의 향방을 좌우하려는 정치적 야심이 깔려 있다. 특히 경제 관련 부처에 검사를 보내는 것은, 기업 수사를 통해 재계는 물론 정치권까지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레버리지를 확보하겠다는 계산이다. 이는 검찰이 국가의 심장부로 파고들어 민주적 정부 시스템을 검찰식 통치 체제로 치환하려는 시도와 다를 바 없다.

수사·기소 분리의 허상과 법적 올가미

수사·기소 분리가 되었다고 떠들지만, 하위 법령을 뜯어보면 실상은 다르다. 특사경이 수사를 시작할 때 검사에게 즉시 통보해야 하는 범죄 리스트를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한다. 내란, 외환, 국가보안법 위반은 물론, 사회적 이목을 끌 만한 중대한 범죄(자본시장법, 근로기준법 등)까지 검사의 눈을 거치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분리인가. 아니면 검사가 수사의 고삐를 놓지 않으려는 또 다른 장치인가. 더욱 가관인 것은 '중요 사건 협력 절차'다. 증거 수집 대상부터 법령 적용까지 검사와 협의해야 한다면, 수사의 독립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이는 검찰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건만 골라내고, 나머지는 경찰이나 특사경의 손을 빌려 처리하겠다는 '선택적 정의'의 교본이다. 특히 '사실관계 확인'이라는 명목으로 피의자를 불러 압박하는 행태는 여전히 살아있다. "검사가 부르는데 배짱 좋게 안 나갈 사람이 어디 있냐"는 말처럼, 제도적으로는 수사권이 삭제된 듯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 숫자로 보는 검찰의 영향력

2026년 9월 18일 기준, 18개 기관에 파견된 27명의 검사는 빙산의 일각이다. 금융위원회(6명), 헌법재판소(3명), 금융감독원(2명), 국무조정실(2명) 등 핵심 부처에 배치된 인력은 우리 사회의 경제와 사법 구조를 검찰 중심적으로 편향시키는 핵심 고리다.

해외 파견까지 포함하면 실질적인 검찰 네트워크는 훨씬 광범위하다.

언론 권력과 미디어 혁명, 그리고 착각

유시민이 느낀 '압박'과 미디어의 변천

유시민 작가가 미디어를 '억압'으로 느꼈다는 고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식인조차 언론이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운영자에게 잘 보여야 했던 과거, 미디어는 진입 장벽이 높은 폐쇄적인 성역이었다. 방송 장비는 초고가였고, 윤전기는 막대한 자본의 상징이었다. 언론사 사장과 기자들이 허락하지 않는 한, 일반 대중이 자신의 의견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것이 우리가 과거에 당연시했던 '매스미디어 시대'의 억압적 구조였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판도를 뒤바꿨다. 핸드폰 하나면 누구나 전 세계를 향해 생방송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시대, 유시민이 이를 '해방'이라 칭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제 시민은 언론사라는 중간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도 정보의 발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기성 언론은 이를 '해방'이 아닌 '위기'와 '혼란'으로 정의한다. 그들은 유튜브를 편파적이고 음모론을 유포하는 저급한 매체로 폄훼하며, 시청자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기성 언론의 비난 속에는 치명적인 착각이 숨어 있다. 자신들이 뉴미디어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그리고 시청자보다 자신들이 우월한 정보를 가졌다는 오만함이다. 20년 기자 생활을 해온 이들도 인정하듯, 제야의 고수는 기자들보다 훨씬 똑똑하고 전문적이다. 기성 매체가 사실 검증을 더 잘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도리어 팩트체크라는 미명 하에 권력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특정 진영의 논리를 사실인 양 포장하는 기성 매체의 행태가 독자들에게 더 큰 불신을 사고 있다.

언론의 비겁한 중립성과 정파성

"우리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야"라는 언론의 주장은 이제 사기에 가깝다. 현실에서 언론은 특정 정치 세력을 공격하는 '선수'로 뛰면서 심판인 척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기자가 비판의 잣대를 세울 때, 스스로의 논리적 검증이나 언론사 내부의 정파성은 철저히 외면한다. 자신들을 비판하는 대상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면서, 본인들의 오보는 '실수'로 치부하는 행태는 비겁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우리는 민주당을 지지한다", "우리는 국민의힘을 지지한다"고 밝히는 것이 정직하다. 정파성을 숨기고 '중립'이라는 가면을 쓴 채 상대 진영을 비판하는 행위는 독자를 기만하는 것이다. 김어준의 방송이 정파성을 띠는 것은 본인의 캐릭터가 분명하기 때문이지만, 기성 언론은 정파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객관'이라는 허울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독자들이 언론을 불신하고, 대안 미디어를 찾는 근본적인 이유다.

💭 언론 개혁,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

취재 현장에서 2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하며 느끼는 바가 많다. 기자들이 전문 지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 양 오만하게 굴 때마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저널리즘의 규범인 '사실 입증', '논리성', '공정성'은 이제 기성 언론이 스스로를 포장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진정한 저널리즘은 특정 정치 세력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의 기준을 자신에게도 엄격하게 적용하는 데서 시작한다. 검찰 개혁이 단순히 법적 제도를 바꾸는 것이라면, 언론 개혁은 이처럼 '선수'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기성 언론의 구조적 오만함을 타파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비겁한 중립성을 버리고, 투명하게 자신의 지향점을 밝히는 용기 있는 보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비평하는 언론, 비평당하지 않으려는 언론

비평의 수준을 스스로 가아먹는 기성 매체

기성 언론은 한평생 남을 비평하며 살아왔다. 권력자를 비판하고, 연예인의 사생활을 들추며, 사회적 이슈를 재단하는 것이 그들의 업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에 대한 비평이 들어오면 "우리 비평은 이해해 줘, 하지만 너희는 우리를 비평하지 마"라며 발끈한다. 이러한 안 좋은 습성은 언론계 전반에 퍼진 기득권 의식의 산물이다. 자신들이 비평의 주체라고만 생각할 뿐, 객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 비평의 수준이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논리도 없으며, 그저 정파적 이익을 위해 비꼬기 바쁜 수준 낮은 비평들. 유시민이나 김어준 같은 인물들에 대해 "수위가 과하다"라며 난리를 치지만, 정작 그들이 비판하는 내용을 보면 정치적 맥락을 완전히 배제한 어거지인 경우가 많다. 기자가 교정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사에 널린 오탈자와 편향된 가치관이다.

모순적인 인정 욕구와 대안 매체의 딜레마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유시민을 후두려 까면서도 그의 인정은 받고 싶어 하는 언론사들의 내심이다. 유시민이 MBC나 JTBC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다른 매체들은 "왜 우리는 빼느냐"며 서운함을 내비친다. 이 모순적인 태도는 무엇인가. 자신들이 비판하던 대상에게조차 인정받고 싶은 그 욕망은, 결국 자신들이 기성 언론의 권위 속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기성 언론이 대안 매체를 비판할 때, 한 번이라도 자신의 보도가 얼마나 정파적이었는지 되돌아본다면 그런 말은 못 할 것이다. "왜 우리를 비판하느냐"는 투정 대신, "우리의 비평이 과연 정당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비평은 야멸찬 것이고, 그 비평을 업으로 삼는다면 스스로가 받는 비평에 대해 관대해져야 한다. 언론계가 스스로의 수준을 냉정하게 돌아보고 정체성을 바로잡지 않는 한, 대중의 외면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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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스는 법무부를 장악하고, 언론은 중립의 탈을 쓴 채 선수로 뛰는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제도는 무너지고 권력은 비대해지는 이 기이한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록하고 의심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일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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